부끄러움

from 이야기 2004/01/30 00:00

대학 2학년 초,
교양학부 수업이 있던 강의동 앞
계단에 나는 앉아서 담배를 피고 있었고
우연히 지나던 친구는
나의 근황을 물어왔었습니다.

*

서울에 올라온 후
서초동에 있는 어느 교회의 대학부 모임에
나는 잠시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었고
남을 위해서도 많은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민하고, 배우고, 봉사하고...
그리고,
대부분 좋은 대학을 다니는 사람이었지요.

저는 그런 분위기가 싫었던 것 같습니다.
늘 의자 뒷줄에 앉아 세상을
비꼬아 보던 시절을 보낸 뒤,
갑자기 의자 앞줄로 밀쳐진 느낌,
달라진 시야의 생소함.
이전까지는 어울리지 못하던 이들과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상황.

*

그 친구도 거길 같이 다녔습니다.
그리고 같은 학교 무역학과를 다니고 있었지요.

*

그 친구를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은
가을이 지나고 한해가 지나고
다시 봄이 되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저는 그만 그 대학부의 집단에 대해
감정에 기울은 비판들을 하고 말았습니다.

어린 날의  
비판이 위험한 것은
본질적인 요소마저 싸잡아 나쁜 것으로
몰아가게 되는 충동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교회라는 조직까지
확대하여 비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속의 삶들에 대해서도
비뚤어지고 부정적인
단언들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친구는 무표정하게
듣기만 하고 있었고,
아마도 내 생각의 과도한 부분들을
지적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

그 후로 그 친구를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90년대의 어느날 아침,
아마도 95,6년이었을 것입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TV를 켠 나는
그 친구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집없는 사람에게 집을 손수 만들어주는
해비태트(habitat) 운동에 참여한 친구가
손수 망치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잠시 보였던 것입니다.

TV 속에 비친 그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침 잠이 깨면서
많이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비꼬인 비판을
가만히 듣던 친구의 표정과
또한 여전히 가만한 얼굴로
묵묵히 망치질을 하는 친구의 모습.

두 얼굴이 동시에 떠오르면서,
말로 비판은 했지만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스스로를 정당화해왔던
제가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일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시간을 죽여가면서도
내 속에 무언가 멋진 것이 있다는
막연한 착각으로 살아오던 어느 날 아침,
그 친구의 망치가
내 뒤통수를 친 것이었습니다.

댕댕댕~





maxwell's silver hammer / beatles
2004/01/30 00:00 2004/01/30 00:00
Tag // ,

Trackback Address >> http://lowangle.net/blog/trackback/120

댓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