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길에 간신히 서 있는 집들을 본다.
칠이 벗겨진 대문을 본다
그리고, 저 비틀어진 작은 창을 본다.

어쩌면 저 창 너머엔
내 어린 시절의 친구가 가만히 앉아
무언가 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 같다.
"나는 창을 열었다"라고 써 놓고는
한참을 자신없어 하다가
'나는'을 '그는'이라고 고쳐 써본다.
"그는 창을 열었다".

그러다가 다시 "그는"을 "나는"으로 고친다.

오래도록 앉아있지만
친구의 글은 진척 되지 않는다.

며칠이 지나면 친구는
그 다음줄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밖을 내다 보았다"

그리고 자기가 본 것을,
뒤틀어진 지붕과 좁고 가려진 골목,
찌그러진 가로등, 얽힌 전기줄...
그 가난한 풍경들이 보여주는
진실이 무엇일지
생각을 가다듬고 가다듬으며
또 며칠을 보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친구의 글은
그 후로 영영 이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도 친구는
전해들은 몇몇의 작가와
헌 책에서 읽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몇줄의 문장,
밤의 라디오가 가르쳐주는 인생론,
그것들에 의지하여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보르헤스도 쿤테라도 낡아버린 시대에
아직도 헤세가 자기의 창밖에 서성이고 있다고
카프카가 내다 본 골목이 이골목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하며
흘러들어온 문예지의 활자 속에서 보았던
이름과 문장들,
그리고 선원이 되어 버린 동네 형들의
전설 같은 몇몇 에피소드에 의지해서
은하수 넘어 나아가기 위해
책상에 앉아있을 지도 모른다.

*

나는 저 창문 옆의 대문을 나와
비탈길을 내려왔고,
다리를 건넜고 기차를 탔다.

나아간다고 생각을 했다.
나아가기 위해 생소한 문법을 배우고
낯선 이름들을 외웠다.
나아가기 위해 돌을 던졌다.
나아가기 위해 취직을 하였고
나아가기 위해 직장을 옮겼다.
그러다 멈추어 섰다.
아니, 멈추어 섬을 당했다.

그제서야 저 비탈길이 다시 보였다.
늘 내 머리 뒤를 바라보던
무심한 눈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내 어린날의 친구는
아직 저기서 책상에 앉아
"나는"이라고 고쳐 쓴 후
"밖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을 궁리하고 있는 것이다.

영상의 시대라고,
멀티미디어의 시대라고 말을 하고
새로운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외친다.
벌써 진부해버린 예언들이 떠도는 거리.
쓰레기로 변하고 있는 약속들 ...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을
나는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골방의 뒤틀어진 창이 들여주던 햇살의 말,
취객들의 발걸음 소리,
겨울 항구의 바람이 창을 들썩이며 들려주던 전언,
세상을 향한 창 앞에 앉아
수줍음으로, 자신없음으로
"나는"이라고 시작하는 저 마음.

내가 비탈길을 내려가고,
다리를 건너고,
기차를 타고 ,
내 무엇이 있다고 믿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고 나아가던 그 오랜 시간동안
나의 어린 친구는
여전히 책상에 앉아 있다.

그렇다.
밤의 창을 열고
건너오는 기차소리와 배의 고동 소리와
취객의 노래를 들으며
또한 라디오가 전해주는
진부한 사랑 노래와 인생론을 들으며
아직도 나는...에 이어지는 문장을
진진실하게 쓰려고,
참으로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려고,
그렇게 앉아있다.

밤이 깊으면 친구는
더러운 이불을 덮고 누워
그의 글이, 삶이  
세상의 누구도 다치지 않고
세상의 어떤 이익을 구하지 않기를 바라며
잠이 든다.

가난한 아버지와 어머니.
교사들도 가정방문을 오지 않는 골목길.
아무런 위로도 올라오지 않는
 저 골목길의 어두운 그림자에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창을 열었다" 다음에 이어질
문장을 궁리할지도 모른다.

*

다시 그 책상으로 돌아가
이어지는 문장을 써야할 때가 아닌가?

지나쳐 온 걸음들.



prison song / graham nash

위의 사진은 영도의 비탈길이 아니다.
아파트만 있는 줄 알았던
상계동 언저리에도 저런 집이 있었다.
2004/02/16 00:00 2004/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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