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림일기

from 이야기 2004/04/14 00:00

52번째 그림일기를 편집 중입니다.

찍고 편집을 하다보면
도무지 이놈의 작업이 뭐에 소용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공인된 영화의 형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깊이 파들어가는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고라파시리즈가 그랬듯이
그림일기라는 것도  툭 튀어져 나온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하늘을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을 찍었고,
거기에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자막으로 얹었습니다.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자연스런 충동에 의한 시작이었지만,
하나 둘 만들어가면서
다른 영상의 길로 가기 위한 연습,
혹은 준비 단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원초적인 커트와 구성으로
완결된 형태를 만들어 왔습니다.
물론 바쁜 저의 생활이 더 이상의 작업을
불허하기도 했지만.
영상에 대한 기본적인 어법을
익힌다는 의미를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50개를 넘게 만들어 오면서
답답함을 느낍니다.
일상적인 것들을 캠으로 찍고
그것에 자막으로 저의 생각들을 넣는 방식이
조금 재미가 없어져 버리고
나름의 매너리즘이란 것이
생긴 것도 같습니다.

그러다 다시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그림일기의 문제라기 보다
제 속의 변화가 더 컸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림일기를 다시 돌아보면,
주변의 일기와 풍경, 사물에
저의 마음을 붙인 즉발적인 영상에서
조금 더 깊은 의미와 상황을 담기 위한 길로 나아왔고
지금 저는 더 깊은,
더 분명한 이미지를 만들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런 전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란 것이 이미지를 통해서
새로운 관계와 질서를 만들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부여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제 속에서 이미,
그러한 관계와 질서를
더욱 내밀하고 깊이있게 만들어 내기 위한
소망이 자라왔던 것입니다.
생업의 많은 부분을 희생하면서,
때로는 현실적인 이득을 놓쳐가면서
지금까지 만들어 왔습니다.
별 대수롭지 않은 것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것이 이미 저의 삶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부터인가,
카메라는 저의 지팡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영화란 것을 보지도 않고 살아왔고
나와 상관 없는 것이란 생각을 하며 살던 어느 날,
내 생활 속으로 툭 떨어진 카메라 하나,
그것으로 찍고 편집을 하면서
저는 내가 정말 보려고 했던 세상이 이것이었구나,
그리고 내가 나아가려고 하는 세상이
이런 모양이겠구나,라고 가늠하기 시작했습니다.
막연한 웅얼거림으로 존재하던 내 흐린 의식에
질서를 부여한 카메라.
이것에 의지하여 나아가는 것이
나의 나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앞으로 저는  
준비되고 의도된 영상을 위해 노력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영화가 될지 다큐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애니메이션 "한겨울 밤의 꿈"을
먼저 찍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더 분명한 걸음을 디딜 수 있는 것은
그림일기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일기를 통해 제가 보았던 세상,
그것을 통해 더듬어 갈 수 있었던 길을
조금 더 분명하게 디디는 일이
다음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밤의 광고판,
골목 사이의 바다,
비맞는 빈병,
아무도 없는 거리,
친구들이 사라진 어린 날의 골목길...
그것을 찍던 시간 속의 내가
조금 더 분명한 걸음으로,
아직은 명확치 않은 그곳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더 노력하고 공부해야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게 되건
그림일기는 계속 만들어갈 생각입니다.
의도된 연기나 원하는 만큼의 연출이 들어갈 수 없고
자막에 많이 의존하는 어정쩡한 영상이긴 하지만,
비디오 일기, 혼자 만드는 사적인 다큐라는 측면에서 보면,
나름의 의미가 있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 보다
나의 그림일기들은
더듬어 나아가는 저의 지팡이가 짚은
분명한 자리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때마다의 나의 한계와 동시에
나의 절실함이 들어간 자리.
다시 한 번, 카메라가 내게 허락된 것에
참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camera / r.e.m
2004/04/14 00:00 2004/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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