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의 침묵

from 이야기 2004/04/27 00:00

많은 위인전과 기록들은
위대한 생애에 관하여
많은 지면을 통해 증언합니다.

그러나 아주 단촐한 기록만으로도
위대함을 드러내는 삶이 있습니다.

재작년에,
성경을 통독하다가 읽게된
갈렙이란 사람의 경우가
그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성경에서
딱 두 번, 육성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로 있었던
이집트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오랫동안 헤맵니다.
준비되지 않은 집단으로서의 헤매임이었습니다.
아직은 국가를 갖출 형편도 아니었고
서로의 마음도 하나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우왕좌왕과 어려움의 끝에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조상들의 약속에 등장하는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로 합니다.
그곳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간첩 12명을 보냅니다.

이집트에서 수백년간 노예로 보내고
광야에서 수십년 떠돌던,
스스로도 자긍심을 지니지 못하던 사람들,
그러니 용맹한 첩자라 할지라도
이미 국가를 형성하고,
농사를 지으며,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군대가 존재하는
그 사회의 모습에 짓눌리게 됩니다.

12명의 첩자 중
10명이 말합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와 다름 없는 존재이니,
저들과 싸우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러나 두 명만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비록 그들이 강대하나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능히 이길 수 있다.

그 두 사람은,
모세 이후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여호수와(조슈아),
그리고 갈렙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성경에서 계속 나옵니다.
모세의 후계자였으니까요.
그러나 갈렙은 기록에서 사라집니다.


그렇게 또 수십년이 지납니다.
광야의 비루한 무리들은
강을 건너고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의 땅들을 하나하나 정복해갑니다.
그러던 중에 결정적인 전쟁을
다시 앞두게 됩니다.
어느 부족은 어디를 맡고
또 어느 부족은 어디를 맡고...
다들 자신 없어 하기도 하고
어려움들이 많습니다.





그때 수십년의 침묵을 뚫고
갈렙이 다시 등장 합니다.
모두를 꺼리는 가장 험한 산지를
자기가 공격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늙은이가 말합니다.
"내가 그때와 일반이라"

수십년이 지난 후 뛰어나온
갈렙의 그 짧은 고백.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젊음과 하나도 달라진 바가 없다는
그의 단호한 외침.

그것을 통하여
그의 수십년의 삶을 관통한 것이
바로 흔들리지 않은 믿음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는 최고의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소임을 다 한 후에는
역사의 뒤에서 묵묵히 늙어갔습니다.
그러하나 필요로 할 때
그는 똑같은 젊음으로 나왔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종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더구나 어떤 이스라엘 장수에 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의 두 고백,
즉, 그의 강함이 드러나는 순간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오히려 그 사이의 수십년.
아무런 기록도 증언하지 않는
그 침묵의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나아갈 때 나아가고,
자기가 머무를 때 머무르는 그러한 삶.
그러나 그 긴긴 침묵의 시간에도
스스로를 지켜가는 삶.
그것이 이땅에는 얼마나 부족한지.

우리는 천박한 욕망에 시달립니다.
주인공이 되고 싶고,
큰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고,
주류의 무언가가 되고 싶고...

그러나 저 두 고백 사이의 침묵을 생각하면
머리가 숙여집니다.

"내가 그때와 일반이라"
내가 그때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삶.

그 고백 직후 그는  
노구를 이끌고
가장 사나운 적을 향하여 말을 달려 올라갔습니다.

그에겐 젊음과 늙음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는 평생 하나의 시간을,
절대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장황한 위인전과
미사여구로 채워진 관제의 전기들 보다
더 큰 웅변으로 말하는
수십년의 침묵.
그 속에서 싸우고 자라왔을 그의 삶,
참으로 본받고 싶습니다.
비록 내가 그만큼 용맹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내게 허락된 작은 부분에서라도 말입니다.








'39 / queen

2004/04/27 00:00 2004/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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