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침의 얼굴들

from 이야기 2004/06/07 00:00
전철을 타고 자리에 앉으면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게 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얼굴, 그 표정을 보고
사람의 성격까지 판단해버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들에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외들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대체로 전철에서 보는 얼굴들은
피로와 편협과 고통과 의심과 불안과
그리고 고개 돌리고픈 기괴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슬픈 얼굴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전철 속의 얼굴들에서
그런 피로, 편협, 고통, 의심, 불안, 기괴함이
모두 사라지고
얼굴 하나하나가 너무도 아름답게 빛나는
이상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두 해 전 쯤의 어느 아침,
이른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비스듬한 아침 햇살이 전철의 창으로 들어와
전철의 바닥에 떨어져있었고
건너편 의자에 앉은
누군가의 발을 매만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었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잠에서 덜 깬 완고한 표정의 회사원,
일찍 출근을 하는 노인의 고집스런 주름살,
워크맨을 듣고 눈을 감고 있는
뾰족한 여자의 얼굴.

그 얼굴을 하나하나  
내가 보는 순간 ,
이전의 얼굴들이 보여주던
완고함, 고집, 피로, 고통의 감정이 가시면서,
또한 내 마음의 부대낌과 슬픔도 사라지면서,
말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얼굴들 하나하나가
지극이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으로
내 마음 속으로
줌인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쁨을 제게 안겨주었습니다.

잘 생긴 남녀가 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인상이 그리 좋지 못하고
잠이 덜깬 피로한 얼굴이거나
쌀쌀맞은 얼굴들이었는데 말입니다.


                                                                           face2, 2004.6.7

전철이 한강을 건너는 동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아주 길고도 오랜 지속된 것 같았고,
그 사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기억이 됩니다.

어떤 신비체험에 가까웠습니다.
모든 이들의 얼굴이
그토록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다니..

수십년 습관적으로 타인을 바라보던
눈의 오래묵은 나쁜 시선이 일시에 사라진 순간.

세상이 새로워 지는 것은
내 눈이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그 아침의 얼굴들은
가르쳐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 얼굴들...
과연 카메라로 찍을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이 기쁨으로 빛나던
그 순간.








by the sea / eleni karaindrou

2004/06/07 00:00 2004/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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