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 이야기

from 이야기 2004/10/26 00:00

*

얼마 전 아이에게
"장화 신은 고양이"를 읽어 주었습니다.
한 번 듣고 나면
아이는 패러디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군화 신은 멍멍이"라는
이야길 만들어 들려줍니다.

*

'장화 신은 고양이'를 읽어주다보니,
어린 시절 장화를 처음 샀던 때가
생각 났습니다.

요즘 애들이야
비올 때 신는 장화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는데
그때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 조르고 졸라서
결국 장화를 하나 샀고
나는 무척 신이 났습니다.

그 장화가 좋았던 것은
빗물에 발이 젖는 걸
막아주어서도 아니고
친구들에게 자랑할만큼
특별히 이뻐서였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

그 장화가 좋았던 건
우선, 흙탕물 위로 첨벙대며
신나게 걸을 수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운동화를 신고는 할 수 없는 짓을
장화를 신고는 할 수 있었던 거지요.
첨벙첨벙, 고인물을 튀겨대며
다니는 즐거움이라니...
장화를 신고 나선 길엔
물 고인 곳만 골라서
첨벙대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장화 속에 물을 가득 넣고 걷는 일이었습니다.
발목을 감싸고 일렁이는 물의 감촉을 느끼고
삐기덕 거리는 소리를으면서
발을 옮길 때의 기분은 참으로 묘하고 좋았습니다.
출렁이는 바다 속에 발을 담근
거인이 된 것 같기도 했고...



                                                                         -2004.10.26  어린날의 장화

*

그러고 보니, 어린 날의 저는
장화의 쓰임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장화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용도에 부합하지 않는,
소용에 닿지 않는 즐거움.

물건들을 용도에 맞춰 쓰는 것이
바르고 현명한 태도이겠지요.
엉뚱한 일탈을 즐거워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즐거워지곤 합니다.

*

비록 소용에 닿지 않더라도,
엉뚱하고 무용한 짓을 하더라도
즐거움을 잃지 않는 아이가
내 속에 살아있기를.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장화에 물을 가득 채운채
첨벙대며 걸어가는 아이가
아직 내 속에 살아있기를...

그러하기를...






lullaby / chuck mangione

2004/10/26 00:00 2004/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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