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서랍 속의 역사

from 이야기 2007/10/31 00:00

몇 달 전에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사진집을 샀다.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잠자고 있던 사진을 스캔 받아 만든 책이다.

6.25 때의 기록 사진들인데
사진에 드러난 이미지들은 참혹하지만
사진 자체는 아주 냉정하게 찍혔다.
미국의 공무원이 자신의 일상적인
직업을 수행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물론 나는 한국 사람이니
윗 세대의 고통과 참상을 보며
아픔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참상의 순간들을
냉정히 찍은 그 시선에
분노를 느끼게 되기도 한다.




곁들인 설명에 의하면
위의 사진은 대전 형무소
정치범 처형 때의 사진이라고 한다.
카메라를 보고 있는 사람은
운좋게도 살아남았지만
확인사살에 의해 곧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죽이고
미국 공(군)무원이
그 장면을 촬영하는 상황.

*

아직도 전쟁에 대해,
또는 그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유롭지 못한 방식으로 말한다.
민족의 비극이니 하는
추상적인 표현의 언저리이거나
냉전시대의 비극이니 하는
우리의 목숨과는 관련이 먼
이야기들만 통용되어 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형제가 형제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 속에 가장 큰 고통이 있다.
우리는 그런 비극을
정면으로 마주한 적이 없다.
비록 그러한 점을 언급하더라도
어느새 논의는 비껴가서
정치적이거나 추상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서로가 죽였다는 그 사실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얼마 남지 않은 임기 내에
역사적인 업적을 기록해두기 위해
김정일과 악수하는 사진을 찍는 대통령,
더 큰 미래를 위해
통일의 길을 열어간다고 하는
프로파간다.

어떻게든 가까워진다는 것은
의미를 지닐 수 있겠지만,
그 속의 진정한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

북한을 남한의
값싼 노동력 제공처와
시장으로 삼으려는 자본의 의도와
그렇게 양보(?)해서라도
자신의 체제를 붙들려는 의도가
만난 지점에서의 악수.
거기에 형제의 죽음과
가족의 찢어짐은 없다.

이승만의 정권 유지용 북진 통일,
박정희의 국민 단속용 민족 통일...
아픔을 겪었던 이들은
늘 역사에서 배제되어왔다.
우리의 아픔은
지배권력을 위한 특정의 용도로
활용되어왔을 뿐이다.

통일이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헤어진 아버지와 아들이,
찢어진 형제들이
서로의 가슴을 끌어안는,
그런 것이 아닌가.

경제 동반자니,
더 큰 대한민국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도대체 무슨 개뿔이라도 되는가?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가장 기본적인 이끌림이
배제되어 있는데 말이다.





성경의 창세기를 읽다 보면,
도망자 야곱이 수십년 만에
형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형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가로챈 적이 있는 야곱은
형과의 만남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형제는 포옹한다.
그리고 야곱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오늘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 지점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


*

사진은 특정한 사건을
생생히 드러내어 주지만,
그 자체로는 힘을 지니기 어렵다.
그것이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미지를 대하는 태도가
형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형제가 형제를 죽였던,
가족이 가족을 죽였던
그 참상을 대면할 태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내 고통의 가장 극단적인 지점이
남의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는
그런, 슬픈 역사.









-아래의 그림은
 몇년 전에 그렸던
 야곱이 형을 만나는 장면을
 재활용했다.




2007.10.31
2007/10/31 00:00 2007/10/31 00:00
Tag // , ,

Trackback Address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