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가서 많이 찍지 못했다.
고모님 인터뷰에 집중을 했고
그 외의 시간은 커피를 마시거나
걸어다니며 기웃거렸다.

일본은 해가 빨리 떨어졌고
기온은 한국보다 높았지만
난방이 없는 다다미방은
생각보다 추웠다.



*이름모를 새



일본 하늘에선 까마귀가 주인노릇하고 있지만,
사진에서 보이는 조금 작은 새들도 많았다.
아침마다 이쁜 소리로 울던 이 새들은
나무에 달린 감을 파먹기도 한다고 했다.


*고모님 댁



내부가 보이지 않게 현관을 가려놓은 가려놓은 막과
빨래집개들.





고모님, 참 많이 늙으셨다.
2002년에 잠시 뵌적은 있지만
내 기억 속에는 검은 머리의
40대 정도의 나이로 계셨는데
이제는 할머니가 되셨다.
일흔 여덟이 되셨지만 그래도 건강하신 편이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시고
교회일을 하시면서 지내신다.
한국에서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일본에까지 가셔서  
가난하지만 그래도 평안한
날들을 보내고 계시다.
오랫동안 어렵게 지내셨지만
성격도 밝으시고 또 솔직하신 분이시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셨다.

일본에 가기 전에는
여기저기 둘러볼 마음도 있었지만
고모님과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고,
또 모처럼 한 걸음이라
더 오래 곁에 있고 싶어서
계속 치바에 머무르게 되었다.





일본의 집은 좁다. 가난한 집은 더 그렇겠지.
두사람이 비껴다니기 힘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시는 고모님.





방에서 바깥으로 본 모습.
전등의 끝에 빨래집개가 묶여있다.
사촌들이 일본에 오면 머물렀던 방에서
나도 머물렀다.





어릴 때 보았던 해파리 같이 생긴 전등.
가만히 누워서 천정을 보면,
어린 시절 생각이 많이 났다.
격자무늬의 천정과 이불등을 넣어두는 벽장...
내가 살던 어린 시절의 집도
일본식으로 지어졌던 것이었다.



*고모님 동네



치바 TV 방송국의 축대에 붙은 동네 이름표.
일본의 길의 구획은 세밀하다.
몇걸음 걸으면 다른 이름이 나온다.
집도 작고 길도 좁고 조금은 답답한 기분이 들지만
또한 잘 정돈이 되어 있어 편하기도 하다.
그리고 아주 깨끗하다.





일본의 기와 지붕과 플라타너스 나무
일본의 선은 직선이 많다.
집들도 그러하고 칼로 잘라낸듯한 선이 많다.
칼과 친한 나라여서 그럴까?





목요일엔 비가 내렸다.
그리고 잎이 제법 떨어졌다.
차가운 방에서 자고 비가 내리니
몸이 많이 추웠다.


*도쿄(東京)에서



토요일엔 도쿄에 갔다.
어리버리 가이드 김다현양과
롯폰기 힐즈에 있는 모리 미술관(森美術館)에 가서
빌 비올라(Bill Viola) 비디오 아트전을 보았다.
작품들이 참 좋았다.
웬지 비디오 아트,라고 하면
좀 뒤틀고 작위적인 것들이 많은데
이사람 것은 자연스러웠고,
또한 어떤 작품들은
서양 회화의 전통과 닿아있어
편하기도 했다.

모리 미술관은 53층에 있는데
그 위층에 전망대가 있어
도쿄의 사방을 볼 수 있었다.
높은 곳에서 잠시 본 도쿄는
장남감처럼,미니어쳐처럼
오밀조밀하고 깔끔했다.





치영이에게 아톰 인형을 사주고 싶어
택시를 타고 테츠카 오사무 기념관에 갔었는데,
기념관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 자리에 엉뚱하게도 무슨 은행이 자리잡고 있었다.
별 도움 안되던 여행정보책은
여기서 완벽히 배신을 때렸다...
올해 6월 개정판인데 말이다...
암튼, 그래서 아톰은 못 샀다.





헛걸음을 허망함을 달래준 사케.
내가 먹어본 술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시는 순간 내입에서 "오이시~"라는 일본말이 나와버렸다.
사진처럼 눈이 팽글팽글 도는 기분이었다.
서울에서 사케를 마실 땐
차가운 사케를 마시곤 했는데
나에겐 따뜻한게 더 좋은 것 같다.



*치바(千葉) 주택가



고모님 댁에서 번화가까지 걸어가는 동안
어린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집들을 많이 보았다.
내가 어렸을 적엔 일본식 집들이 참 많았다.
가끔 옛날의 어떤 순간으로
내가 걸어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무로 지은 2층집도 보았다.
아직도 충무로의 대한극장 뒷편이나 후암동엔
이런 집들이 보이곤 한다.
물론 새로지은 집들도 많이 있지만,
재료는 달라도 기본적은 모양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어떤 자신들의 틀,
야박하리만큼 간결하지만,
어쨌던 정돈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하다.


*일본인 교회



1926년에 새워진 일본인 교회.
일요일 낮 예배에 참석했는데
한국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찬송과 말씀을 듣는 것은
참 묘한 기분이었다.
설교 본문은 출애굽기 3장의 초반부.
목동으로 살던 모세를 신이 부르는 장면이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한 모세에게
신의 사자가 찾아온다.
그리고 모세의 사명을 말해준다.

이집트 왕자였다가  
마흔살이 되어 도망자가 된 모세.
그 후로 사십년간 그는 광야에서 목동으로 살았다.
혈기와 의지와 욕망들이 모두 꺾여진
그 지점에 찾아온 신의 음성.

이 장면이 참으로 위안이 되는 것은
우선은 내 나이가 어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또한 나의 의지와 계획과 힘이 아니라
내 무력함 속에서 은총처럼 주어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
그리고 내가 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신이 나를 부른 것임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별볼일 없는 목동으로 늙어가던 그를
신이 찾아와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점이다.

나의 수년 전이 그러한 때였다.
가끔은 그 순간을 잊는다.
그러나 낯선 땅,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의 예배가
그 때를 되살려주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속에서
가끔 알아 듣게 되는
아브라함의 신, 이삭의 신, 야곱의 신이라는 말은
한국어보다 더 크게
내 마음을 찔렀다.


*번화가



일본에선 걸어다니며 담배를 피지 못한다.
치바역에서 번화가 골목으로 접아드는 초입에
이런 표지가 붙어있었다.
물론 여기도 이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나 멋진 스타일을 한 젊은 여자들이
거리에서 담배를 물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Cafe di Espresso



매일 갔던 커피숍의 창가 자리.
여기에서 커피를 마시며
지나다니는 일본 사람들 얼굴을 구경하곤 했다.
옆자리엔 가끔 같은 사람이 앉기도 했다.
50은 훨씬 넘겨보이는 아저씨인데
혼자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면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일본에는 노인이 혼자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러 오는 경우가 많았다.
자식들과 부모와의 유대가
점점 더 약해져 간다고 한다.
팔십은 되어보이는 노인이
혼자  자전거를 타고 자기 짐을 끌고
오다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사와라(佐原)



김다현양의 선배인 김선희씨의 차를 타고 갔다.
일본에 간다,라고 생각을 했을 때,
불쑥 떠오른 이미지가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이었는데
사와라에는 그런 하천이 있었고
하천 주변에 옛날의 거리와 집들이 늘어서 있어 좋았다.
좀 헤매는 바람에 늦게 도착을 해서
오래 둘러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참으로 좋았다.





메이지 21년부터 장사를 했다는 소바집.
검은 소바를 먹었다.
참 맛있었는데 양이 너무 작았다.




*치바의 밤



다시 치바로 돌아와 주점을 찾아 저녁겸 술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즐거운 시간이었다.
가이드를 해주시고 운전도 해주시고
좋은 시간과 선물까지 주신 두 분께 정말 감사 드린다.
사진은 바다님께 전화를 하는 순간.





좁은 길, 작은 가게들.
치바역 근처의 번화가는 남포동을 생각나게 했다.
사진엔 밤이 늦어 불빛들이 많이 꺼져있다.



*치바 도심



마지막 날 인터뷰를 마치고
오후에 늦게부터 치바 거리를 좀 찍었다.
빌딩에 걸린 햇살을 찍고
걸어가는 사람을 찍고
빛나기 시작하는 간판을 찍고
사람들의 오가는 모습과
지나가는 기차도 찍었다.

비록 일주일간이었지만
내 사는 곳처럼 걷던 거리를 떠난다니
좀 서운했고 이상하게 피로가 밀려왔다.

사진은 도심을 지나치는 모노레일 선로.



*센베이



고모님은 끝내 치영이 선물을 사주셨다.
백화점에서 스웨터를 하나 사주셨고
또 치바에서 유명하다는 다코자코(田子作) 센베이 가게에서
치바의 명소들이 새겨진 센베이도 사주셨다.
저렇게 예쁜 그림이 새겨진 과자를
어떻게 먹을까, 싶었다.
김다현양에게 이걸 사주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

단정하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친절하고
조금은 답답하고
조금은 우울한 곳.

내가 어릴 때 보았던,
그리고 살았던 환경 속에
일본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확인하게 되었다.
나의 다소 결벽적인 취향도
어쩌면 그쪽의 성향과
닿은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참으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또 참으로 아득하게 생소한 나라.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다시 오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고모님과 함께한 일주일.
참으로 좋았다.
고모님과의 대화 중에
따뜻한 끈이 늘 묶어주고 있었고,
이야기를 듣고 나누면서
슬픔이기도 하고 기쁨이기도 한,
그런 것들로 가득한
경험을 하곤 했다.

찍어온 것이 어떤 형태로
가공이 될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내가 거기서 고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간만으로도 충분하다.
기록, 표현, 예술이라는 것보다
삶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내가 고모님을 더 이해하게 되었고,
고모님을 더 가까이 느끼게 되었고,
고모님의 사랑을 느꼈다.
무얼 더 바라랴.







2006/11/24 00:00 2006/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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