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것들 6 - 나

from 사진, 이미지 2009/05/01 12:00

마지막 주제 '나'

'본 것들'이라는 타이틀 아래,
2002년부터 지금까지 내가 홈페이지에 올린
사진들을 훑어보고 있는데
'나'라는 소제목을 붙이니 좀 이상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그 기간은 세상을 본 시간이기도 했지만
내가 나를 돌아본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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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최초의 카메라 trv30.  처음 장만했을 때 껴안고 잠을 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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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며 편집하던 날이 많았다. '그림일기_2002.9.23' 편집중인 프리미어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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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만드는데 치중하다 보니 일은 막바지에 몰아서 밤을 새며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고도 어떻게든 먹고 살았다.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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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으로 '영화'라는 것을 보겠다고 생각했을 때 처음 보게 된 것이
'로베르 브레송'과 '오즈 야스지로'의 회고전이었다.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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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이란 말을 거의 쓰지 않지만 존경하는 작가 최민식 선생의 사진집.
부산의 전시회에서 직접 뵙고 사진집에 사인도 받았다.
또 다른 좋아하는 사진작가라면 '쿠델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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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화장실의 먼지 낀 창. 흐리고 앞이 막힌듯 하지만 걸어갈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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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리에서 사무실을 찍은 사진. 내 자리에서 저 창을 바라보면
창 너머의 무언가가 부르는 것 같았다. 이제 걸어나갈 때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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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잘 치지도 못하는 전자 기타가 있다. 가장 후회되는 일 중 하나. 밴드를 못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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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뜯어내고 작업과 관련된 것들을 붙였지만  내게 중요한 것들을 붙여놓았던 책상 머리.
아이 사진, 동삼동 패총의 토기 그림, 좋아하는 성경 구절, 삐에르 신부 사진, 홈페이지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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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내 뒤통수를 보고 있는 나의 분신인 마분지 인형들. 그리고 302번 버스.
저 302번은 어릴 때 해운대에 갈 때 타고 다니던 버스다. 다음에 부산에 내려가면
저걸 타고 많이 달라졌다는 해운대로 가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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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번째 카메라 panasonic gs400. 가격에 비해 좋은 화질을 가진 기특한 카메라.
고장으로 여러 번 속을 썩였지만 이걸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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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많이 걸었다. 여름이면 샌들을 신는데 양말 세탁할 일이 없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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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하면서 병 속에 모아둔 영화 티켓들.
보이는 것은 오즈 야스지로의 '꽁치의 맛' 티켓이다.
오즈를 보고 있으면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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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책상에는 여기저기 촬영한 테입이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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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에 집착이 없는 편인데, 어려서부터 시계는 마음을 끈다. 기계식 세이코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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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그 동안의 영상과 그림을 모아서 dvd를 만들었다.
이걸 만들고 나니, 그래도 한 시절을 매듭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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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잇에 써서 붙여 놓은 예수의 말.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사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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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 손의 손톱을 깎았다가 다시 기르고 있다.
그래봐야 4번선은 끊어져있는 경우가 많고,
연습도 연주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실력은 늘지 않는다.
하지만 기타는 내 오래고 오랜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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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들기 전, 긴 글을 써왔다.
홈페이를 연 후, 내 문장 습관들을 다 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얼마 전 저 글을 이어서 써나가야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과연 다시 이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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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작업 중인 다큐의 편집 화면과 삽입곡 악보들.
다큐를 '내가 만든다'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 작업의 과정이 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힘든 이야기가 많은 세상에서 지금 내가 작업 중인 다큐는
큰 이야기도, 비중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어려서 외면했던,
대면하기 힘들었던 것들을 다시 만나게 한다.
역시, 다큐는 아무나 만드는게 아닌 것이었다.
뭐, 그림일기도 나름 다큐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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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그려준 내 얼굴. 윙크하는 거란다.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그림. 누가 모나리자를 들고 온다면 바꿀까 말까
잠시 고민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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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이루지도 못할 거면서, 또 풀밭의 주인공이 되지도 못할거면서
무턱대고 피는 보잘 것 없는 생명.
이런 것들에 눈이 많이 갔다. 내가 만든 것들 또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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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있는 것, 멋진 것을 바라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내 곁에 있는 것을 보는 것으로 시작하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지나쳐 힘이 빠지고 돌처럼 굳어져 가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약간의 공황상태를 경험하면서 시간도 허비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웅크린 날을 털고 일어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우선 홈페이지를 옮기는 것이고
그 동안 내가 보았던 것들을 다시 정리해 보았다.

그 동안 카메라는
내가 치나치고 살았던 것들을 다시 들여다 보게했고,
맨눈으로는  대면하기 힘들었던 중요한 국면들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만약, 내가 들고 다닐 수 있는 trv30이 아닌
더 큰 카메라를 샀다면 내 걸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픽션들을 찍기 시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생각해 보지만, 만약은 없는 거다.
암튼, 오랫동안 주저 앉아있긴 했어도
나를 깊이 돌아보았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

나는 이미지를 다루는 사람이지만
이미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내게 이미지는 꼭 필요하지 않으면 쓰지 말아야할 어떤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버려져야할 무엇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그 너머의 세상을 연 것처럼,
이미지의 운명도 그러해야한다고생각 한다.

길고도 지리한, 지지부진한 날들 속에서도
그러한 생각을 가다듬게 한 카메라에 감사한다.
다시 한 번, 내게 카메라가 주어졌음에 감사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제 시작하는거다.

그동안 나이를 더 먹었지만 다시 시작하는 자유쯤은
내게 남은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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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trv30, gs400
        2002년~2009년
2009/05/01 12:00 2009/05/0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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