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리고 예수께서 길을 떠나실 때에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생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18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합니까?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 19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손해를 끼치지 말라.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당신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20 그러시니 그 사람이
그분께 말했다. "선생님, 그런 것은 제가 소년 시절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21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를 눈여겨보고
그를 사랑스레 여기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에게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 22 그러나 그 사람은 이 말씀
때문에 슬퍼하고 근심하면서 물러갔다.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23 그러자 예수께서는 둘러보시면서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몹시 놀랐다. 예수께서는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들들이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 26 그러자 제자들은 더욱 놀라 서로
말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2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면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 10장)

이 에피소드는 개신교 교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어 왔다.
대개 개신교는 중세 가톨릭의 타락에 대항한 종교개혁으로
만들어진 걸로 알려져 있다. 물론 사실이지만 종교개혁의
좀더 중요한 본질은 십자군 이후 봉건사회가 점차
무너지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왕과 귀족들을 제치고 서서히
서양 세계의 새로운 주인으로 나타난 도시 상인들, 즉
부르주아들이 왕과 귀족의 교회인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이해와 정체성에 맞는 교회를 세운 사건이었다.
말하자면 종교개혁은 자본주의 사회 탄생의 서막이다.

부르주아들의 이념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개신교가
가톨릭과 비교하여 가장 주요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역시 '돈'이다. 중세 교회는 실제로는 매우 타락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돈과 물질적인 부를 영혼을 더럽히는 것이라
여겨 경계하고 죄악시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런 종래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돈과 물질도 하느님의 축복'이라
주장했다. 루터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종교개혁가라
일컬어지는 칼뱅은 아예 최초의 자본가 정신을 설파한다.
"사업으로 얻는 소득이 토지 소유로 얻는 소득보다 많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뭔가? 사업가의 이윤이 그 자신의 근면과
성실에서 오는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온단 말인가?"

칼뱅의 주장은 아버지가 누구냐에 따라 일생 동안 부와
신분이 결정되는 봉건사회에 비추어 매우 정당하다. 아무리
능력 있고 성실해도 아버지가 천한 신분이면 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항하여 신분이 아니라 능력과 노력이
사람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얼마나 정당한가.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자부주의 사회가 과연 그런가, 하는
점이다. 오늘 한국의 평범한 노동자 한 사람이 가장 부자로
손꼽히는 한 재벌 총수의 재산만큼 벌려면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꼬박 50만 년을 모아야 한다. 이것은 능력과 노력의
차이가 아니라 뜯어고쳐야 할 '악의 구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부는
사회적으로도 존경받고 교회에서도 하느님 축복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당한 방법'이란 '합법적인 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법이란 하 사회의 지배세력이 자신들의
이해와 정체성을 기반으로 사회 성원들을 강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공정한 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회
성원의 이해와 정체성이 완벽하게 하나인 사회가 아니라면,
모든 사회 성원에게 공정한 법은 존재하려 해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법은 어느 탈옥수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약하고 가난한 사람의 작은 잘못엔 엄격하지만
힘세고 부자인 사람의 큰 잘못에 늘 관대하다. 그런 현실에서
부가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는 주장이나, 합법적인 방법으로
쌓은 부는 정당하다는 주장은 기만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단지 그런 기만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부
자체에 대해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말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땅의 기준으로 볼 때 이 말은
지나치다. 세상엔 진정 능력과 노력으로 그리고 진정 정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도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하늘의 기준에서 이 말은 백번 지당하다.

하느님 앞에선 누구든 귀하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힘없는
사람이든 권력자든 차별 없이 귀하다. 하느님 앞에서 빈부
격차는 그 자체로 악이다. 그런데 빈부 격차란 왜 생기는가?
고루 나눠 갖지 않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부는 능력과 노력의
결과인가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것인가와 상관없이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이다. 부자들의 재산은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라 탐욕의 결과일 뿐이다. 하느님은
그들이 재산을 모두 나누어 자발적으로 가난해지지 않는 한
하느님 나라에 들이시지 않는다.

제자들의 반응에서 보듯 예수 당시에도 부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부가 하느님의 축복이라면
가난은 하느님의 저주가 된다. 물론 누구도 가난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부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말할 때 이미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을 하는 셈이다. 그런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난은 단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게 된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으로 겪는
불편함에 더해 인간적으로 무시당하고 차별받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 저주를 뒤집는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저주가 만연한 세상을 향해 '부자는 절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한다.

예수의 선언과는 아랑곳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저주는 지속되거나 오히려 강화되어 왔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부자는 절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의 말은 개신교 교회, 특히 예수를 팔아
번창하는 보수적인 개신교 교회들을 얼마간 곤혹스럽게
만들어 왔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고 떠들어 대는 그들
뒤에서 예수가 씁쓸히 웃으며 '아니다,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라고 말하는 꼴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이어지는 말로 모든 걸 뒤집는다. "사람들은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오늘 그 교회들은 당당한 얼굴로 말한다.
"부자는 원래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부자는 천국에 간다. 예수님 말슴대로!" 간교함도 이
정도라면 할 말을 잃게 한다. 그들을 단지 '타락한 교회'라고
말하는 건 잘못이다. 그들은 교회의 탈을 쓰고 하느님 나라와
대적하는 순수한 사탄들이다.

"하느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는 예수의 말은
부자들이 어느 날 자발적 가난을 자유와 기쁨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을, 사람은 못 해도 하느님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은 지금 아무리 부자라 해도 그가
언제든 삶을 전복시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자,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하느님이나 할 수 있다고 말할 만큼 쉽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예수는 부자 청년에게 '자발적 가난'을 권유한다. 단지
자발적 가난이 옳고 훌륭하기 때문에 고통을 감수하라는
뜻이었을까? 사람은 대게 좀더 자유롭기 위해, 그런
미래를 위해 돈과 물질을 모은다. 그러나 돈과 물질이
쌓이면 쌓일수록,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수록
이상하게도 정작 자유는 점점 멀어져 간다. 누구나 인생을
마감할 때가 되어 제 인생을 돌이켜 보면 인생에서 가장
자유가 넘친 시기는 그것을 누릴 여건이 가장 빈약했던 청년
시절이기 마련이다. 사람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부는
생각보다 적다. 그걸 넘어서는 부는 실은 사람에게서 자유와
평화를 앗아 간다. 꼭 필요한 수준 이상의 부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는 것,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는 것은 그런 어리석은
행로를 스스로 완전하게 멈춤으로써 자유를 회복하는
방법이다. 예수가 부자 청년에게 자발적 가난을 권유하는 건
그것이 옳고 훌륭한 길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도 감수하라는
게 아니라, 또 부를 죄악시하며 가난이라는 새로운 계율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가진 돈과 재산 때문에 사라져 가는
진정한 자유를, 인생의 참 즐거움과 행복을 늦기 전에 되찾길
권유하는 것이다.







김규항의 '예수전'에서 옮김.

2009/05/07 00:54 2009/05/07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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