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from 이야기 2003/12/23 00:00



렘브란트의 미완성 유작
<시므온의 노래>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마무리 되지 않은 작품이지만
오히려 그렇게 남겨진 것이
더 큰 감동을 준다는 생각도 듭니다.

생의 마지막 숨을 쉬는 듯한 늙은이가
감겨드는 눈을 겨우 뜨고
갓난 아이를 보고있고
얼굴이 동글하고 넓적한 아이가
노인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태어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기 위해 아기 예수가 회당에 갔을 때,
평생토록 메시아를 기다려온
시므온이라는 노인과의 만남의 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 이미 이 광경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그림을 보면
렘브란트의 젊은 거장 다운 필치와
그 음영의 무게감이 압도하는  
걸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감동으로 따지자면,
단촐한 이 그림만큼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

시므온.
그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를 보리라는
신의 약속을 믿으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일찌기 폐허가 되었던 예루살렘은
어둠의 왕국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고
거기에 폭군 헤롯이 왕으로 있었습니다.
역사의 밤은 깊고도 깊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래전 약속처럼 메시아가
태어나길 기다리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늘의 절대 권력을 양손에 가지고 내려와서
그들의 원수들을 일거에 물리칠 강력한 왕,
이 고통과 비루함의 역사를 끝내줄
해결사.

그러나 왕은 그들의
기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왕은 메시아는 변두리의 여인숙,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탄생을 안 것은
추위에 떨며 야근하던 목동들이었고
별을 보고 찾아온 머나먼 나라의
이방인들 뿐이었습니다.

세상이 놀랄만한 기이함, 힘과 더불어
온 것이 아니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하찮아 업신여김을 받을만한
모습으로 왔던 것입니다.

스스로 역사의 주인이라 믿었던 사람,
그들만을 구해줄 절대자를 기다리던 이들은
그 탄생을 알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보고야 말았습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이 아닌
가장 취약하고 가장 연약한
사랑의 방법으로,
싸워 이김으로써가 아니라
대신 죽음으로써
사람들을 구하러 온
어리석은 왕을.
스스로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연약한 아기 속의 메시아를.

*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요?

기다려야 할 것을
모두 놓쳐버리는 것이
우리의 하루하루인지도 모릅니다.
아침 출근길에 보았던 웅크린 실루엣,
잡아주지 못했던 내민 손의 잔영,
고개를 돌리는 이의 옆얼굴.
무심코 지나버린 소중한 무엇...

그러나 그 순간들을
다 흘려버렸다고 쓸쓸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의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된 기다림은 절실하고도 중요한 존재를
자신의 삶 안에서 자신의 것으로
내려놓아줍니다.

*

저 흐려진 얼굴,
손의 모양마저 보이지 않는 그림.
그러나 오히려 이 그림이
젊어서의 그림보다 더 빛나는 이유는
평생을 기다리며 살아온 시므온의 늙음과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아기 예수의 그모습 그대로의
만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젊은 날의 그림이 보여주던
내리 꽂히는 빛 속에서도 아니고
미술 전통이 힘을 더해주는
양식 속에서도 아닙니다.
힘없고 늙어버린,
이제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노인과
얼굴 둥글고 넙적한,
갓난 아이의 대면.

렘브란트는 신화와 위의와
미술의 관습들까지 모두 제거함으로써
아기 예수의 탄생이 곧 나의 문제임을
깨닫게 합니다.
저 시므온의 절실한 평생의 기다림이
나의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erbrame dich / j.s. bach (yoyoma)
2003/12/23 00:00 200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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