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from 이야기 2009/05/25 16:35


내가 죽음에 관해 처음 생각해본 것은 다섯 살,
어쩌면 일곱 살 쯤이었을 것이다.

동생들과 놀다가 혼자 벽장 속에 들어갔고
깜깜한 곳에서 한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죽으면 이렇게 깜깜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후,
죽으면 이런 깜깜하다는 생각도 없겠구나 싶었다.
그 순간, 까마득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내가 느낀 최초의 아득함이었다.
깜깜함을 지나 깜깜하다는 자각조차 없는
어떤 상태.


*

3월, 외숙모님을 인터뷰하기 위해 외가를 찾았다.

오랫동안 병과 함께 살아오신 외숙모님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듯, 간신히 목을 넘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쇠잔한 목소리는 끊기지도 주저하지도 않았다.
마치 수년 간 인터뷰의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아니 이때가 아니면 다시는 말 할 기회가 없겠다는듯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하루는 느그 어버지가 일 하다가 맨발로 달려온 기라.
니가 없어졌다고. 아(아이)가 없어지니까 놀래서 신발도 안신고 뛰어온 기라.
그때 전화가 있었나 뭐가 있었나, 그래 사방으로 나가서 찾는데
날은 깜깜해지고 길거리나 학교 운동장에 가서 보면
아들이 다 니처럼 보이고...그래 날은 어두워지고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니가 집에 들어온기라.
친구들이랑 바닷가에 갔다면서 신발에 조개 껍데기를
한거(가득) 넣어가지고 맨발로 걸어온 기라."

나는 인터뷰를 진행하기 힘들었다.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들으며
눈물을 참느라 애썼기 때문이었다.
인터뷰라고 했지만 내가 무언가를 질문하고 말 것도 없었다.
외숙모는 내가 묻지 않아도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아니 그 이상을 풀어내셨다.

"꿈을 꾸면 천국에 가는데,
느그 아버지가 젤로 먼저 마중 나오는 기라.
결혼할 때 그 모습 그대로, 곤색 양복을 입고.
그래서 내가, 용우 아버지는 우째 이리 하나도 안 늙었노
용우 엄마는 할매가 됐는데, 하고 물으면
천국에서는 영혼이 늙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기라."

그즈음에 이르러 나는 질문지를 아예 내려놓았다.
천국에서 마중 나온 아버지 이야기들 들으며
마음은 푹 주저앉아 버렸고,
속으로 아이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외숙모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아버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오면서
가장 듣고 싶었던 이야기인지도 몰랐다.
내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간절히 확인하고 싶었던 것.
아버지는 그 아들을 참 아꼈고,
아버지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

*

아버지가 마음을 의지할 수 있었던 이는
친형제들도 아니었고 또 어머니도 아니었고
아마도 외숙모였을 것이다.
서로를 살피는 정이 모자란 형제들,
아버지를 따르기만 하는 어머니,
부모 없는 이북 사람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고
나중에도 불편하게 대했던 둘째 외삼촌.
하지만 외숙모님은 이북사람이면 어떻고 부모가 없으면 어떻냐고,
일 열심히하고 가족 아끼고 신앙이 좋은데,
도대체 뭐가 모자라냐고 생각을 하셨다.
특히나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던 손 아래 시누이,
내 어머니의 남편이었다.
성격이 팍팍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던 형제들 중
자기 챙길 줄 모르고 착하기만한 작은 시누이를
외숙모는 동생처럼 사랑했다.
그리고 그 시누이를 좋아하는 아버지가
마음에 드셨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친척들 집을 돌며
쌀 한말씩을 얻어온 것도 외숙모님이셨다.


                                              - 1970년 전후, 아버지가 일하셨던 공장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나는 천국의 이미지를 도무지 떠올릴 수 없다.

고등학교 때, 카뮈(a. camus) 소설집의 해설을 읽다가
'신들의 다정한 침묵'이란 말을 발견했다.
그 말이 오래오래, 지금까지 내게 남은 것은
어린 내가 느끼던 교회의 분위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 마음의 깊은 곳까지
일일이 다 보고 판단하고 심판의 근거로 삼는 신.
계율과 행동을 절대적으로 중시하던 교회 분위기는
분방한 어린 마음을 짓눌렀다.
심판을 준비하는 무서운 신에게
나는 이미 금지당했고 용납받지 못할 존재라고
스스로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죽음이란 천국에 이르는 무엇이 아니라
캄캄함 너머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 이르는 거라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커서  카뮈의 그 말을 접하고
다정한 침묵으로 어린 존재를 놓아주는 신을
동경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생에서 기도 외에 다른 길이라곤 없는
가난하고 의지 없는 이들의 삶을 마주하게 되면
고통과 아픔이 보상받는 밝고 환한 천국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이생의 오만한 힘들에 의해 무시당하고 버려진 존재를
도대체 무엇으로 위로한단 말인가?

*

나이들어 성경을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새기게 된 구절들이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왔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며...'

천국은 저 멀리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주어진 것이란 말씀이었다.
내가 해야하는 일은 그것을 넓혀가는 일인 것이었다.
그것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구절의
본뜻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했다.
세상이 인정하는 어떤 것,
소유이거나 명예이거나 어떤 것도 떼어줄 것이 없기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끌어안는 것.
그 속에 이미 천국이 있다고 깨우치는 것이다.
수십년간 부모의 소식도 생사도 모르고
버거운 육체 노동에 시달리다가
천국보다 먼 고향 소식 하나 접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아들에게 사랑을 전해주던 외숙모님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받아들이던 그 시간.
그 속에 이미 천국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
외숙모님이 꿈마다 그리워하시는 그 천국도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의 천국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

어두운 옷장 속에서
캄캄함 너머를 상상하며 아득해하던 아이는
더 이상 아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2009/05/25 16:35 2009/05/2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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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smine  2009/05/26 17:0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제 오픈아이디가 되어요. 근데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어요. ㅡㅡa 이름을 안 써도 된다는 거? 오호~~~그건가? "신들의 다정한 침묵"이라는 말을 일깨워 주신 덕에..... 나는 헌신을 강요하는 생활은 원치 않아! 라고 주먹을 꼭 쥐었던 예전의 분노에 대한 약간의 답을 얻는 기분이.....^^;; 감사~

    • 마분지 2009/05/26 17:35  address  modify / delete

      오픈 아이디라는 게 쓸만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름을 안써도 된다지만, 아이디를 입력하는 귀찮음이 있을테고,
      뭐 이름 도용이 방지된다고 하는데
      뭐 이런 조용한 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리 없고,
      과연 필요한 것일까,라는 생각도 드네요...

      얼마나 억압이 심하게 느꼈기에 침묵이 다정하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체제로서의 종교란 억압의 측면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내면의 진실한 믿음과도 부딪히기도 하고...
      '제발 날 좀 가만 좀 내비둬~'라고 외치는 마음이
      생기는 경우가 많지요.
      뭐 그렇다고 그저 놓인 상태가 좋은 것도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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