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송 주간

from 나날 2009/07/13 12:20



브레송(Robert Bresson)의 영화들을 다시 본다.
구할 수 없던 몇몇 DVD가 출시되어
다시 죽 보기로 했다.

주말에 '소매치기(pickpocket)'와
'당나귀 발타자르(au hasard Balthazar)'를 보았다.
DVD로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

의식적으로 영화란 것을 챙겨보겠다고
시네마떼크 등지에서 찾아본 회고전.
과연, 그 때 내가 본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보니, 새로운 면들도 많고
이전보다 더 긴박감을 느끼게 된다.
또 다른 영화들과의 차이에 치중한 많은 해설들이
좀 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암튼, 편치 않는 날들인데
브레송 영화들을 보는 것이
그나마 행복감을 가져다 준다.

일단 즐겁게 보기로 하자.
섣부른 말들은 접어두고.


*

7/11
소매치기, pickpocket, 1959

처음 볼 때 부터 이상하게도 익숙하고 편했던 영화.
화면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소리와
클로즈업 된 손들의 움직임.
경쾌함과 반복의 힘.
       
7/12
당나귀 발타자르, au hasard Balthazar, 1966

잊고 있었던 마지막 장면.
양들에게 둘러싸여 당나귀 발타자가 죽은 후,
결국은 양들도 떠나고 만다.
빈들에 버려진 발타자르의 시체.
왜 그 장면을 잊고 있었을까?
어떠한 위안도 은총도 없는 끝.

7/13
시골 사제의 일기, Journal d'un curé de campagne, 1951

'아름다운 이미지란 없다.
필요한 이미지만 있을 뿐이다'라는
브레송의 말이 무색한 영화.
아름다운 그림들로 가득하다.

7/14
사형수 탈옥하다, 혹은 바람은 불고 싶은 곳으로 분다
Un condamné à mort s'est échappé ou Le vent souffle où il veut, 1956

탈옥을 위한 끝 없는 노력, 그러나 불쑥 나타난 장애.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담을 넘을 수 있었다.

관련된 성경 구절을 옮겨 본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
(요한 3:3-12)

7/15 
호수의 랑슬로, Lancelot du Lac, 1974

'시네마토그라프에 관한 단상'의 내용과
가장 잘 어울릴 법한 영화.
철갑을 뚫고 솟아나는 피들.
갑옷은 그 어떤 영혼도 지키지 못했다.

7/16
아마도 악마가, Le Diable Probablement, 1977

브레송 특유의 연기하지 않는 연기가
절정에 이른듯한 영화.
사운드 역시, 정말 좋다.
나눠 찍기를 거부하는, 그리고 설정 샷이 없는 카메라로 인해
연기들은 마치 전위 연극을 보는 듯하다.
고결하고 비타협적인 한 영혼이
세상과 직면을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이미지를 다림질하고 목소리를 눌러도
고통은 절절하다

7/17
무셰트, Mouchette, 1967


장난처럼 시작되어 죽음으로 이르는
영화 마지막의 자살장면은 정말 놀랍다.
원작 소설의 내용인지 아니면 영화적 창안인지...
당나귀 발타자르와 함께
가장 아름답고 슬픈 영화.
 

*

몇몇 이야기들을 인용해보자

브레송의 최근 영화는 시각 효과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것'도
사절한다. 그의 영화에 출연한 비전문 배우 가운데 외모 면에서
잘 생기거나 매력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클로드 레이뒤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의 사제), 마르탱 라살('소매치기'의 미셸),
플로랑스 카레스('잔 다르크의 재판'의 잔 다르크)를 처음 보면,
참 평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 얼굴이 놀랄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아닌 모든 것, 일화나 장식에 지나지 않는
모든 것을 내버려야 한다. 브레송은 콕토와 달리 영화의
드라마적 요소외 시각적 효과를-확대시키기는 커녕-줄이고 싶어했다
(이점에서 브레송은 30년에 걸쳐 영화를 만드는 동안 카메라의 움직임,
디졸브, 페이드 효과 따위를 점차 폐기시켜 나아갔던
오즈를 연상시킨다). 자신이 만든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금욕적인 마지막 영화(아마도 '잔 다르크의 재판'을 말하는 듯)에서
브레송은 너무 많은 것을 빼버렸고, 구상을 지나치게 다듬어낸 것도 사실이다.
이정도로 야심에 찬 구상은 극단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겠지만,
브레송의 '실패'는 대다수 감독의 성공보다 높은 가치를 지녔다.
브레송에게 예술은 꼭 있어야 하는 것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그뿐이다.
-수전 손택

"드라마에서 감정을 보이는 것은 쉽다. 배우들이 울거나 웃으면,
쉽게 슬픔 혹은 기쁜 감정들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것은 설명에 불과하다. 나는 극적인 감정의 고저를
상세히 서술하지 않고 인생이 어떠한 것인가를 사람들로 하여금
느끼게 해주고 싶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는 미술보다는 음악과 훨씬 닮지 않았습니까?"
-로베르 브레송


다시 보게 되면서 위안을 얻기도 하고
놀라운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 시간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힘들었다.
그것은 강박적 스타일의 팍팍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암담함 비전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을 정직하게 본다면, 희망이 없을 것 같다.
문명이라는 야만, 그 일상에 익숙해 있다가
마음을 정돈하고 직면하게 되는 순간의 어두움을
브레송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죽음 이외에는 출구 없는 세상의 어두움.
그 영화에서 어떤 성스러움을 엿본다는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인 것이다.

가득한 어둠 속에서 섬광 같은 빛을 보여주는 영화.
그러므로 그의 영화는 아름답다.
그러나 한편, 다시 보기에 망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살아있는 한, 그런 순간이 있음을 믿고 싶은 시간이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잔다르크의 재판을 못 본 것이 아쉽다.


2009/07/13 12:20 2009/07/13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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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smine  2009/07/16 17:3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브레송 영화주간까지는 안 되더더라도 저도 가볍게 로봇 영화주간 같은 거라도 하고 싶은데...업무가 늘어난 이후로 며칠 동안 그림일기 와서 볼 시간도 없어요..ㅠ.ㅠ
    그림일기 이제 20개만 더 보면 되는데...어흑...같이 영화를 보러 갈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여~~

    • 마분지 2009/07/17 13:37  address  modify / delete

      직장이란 곳이 원래 월급 10만원 올려주면
      100만원 어치 일을 더 시키는 곳이 더라구요.
      저는 한가한 편인데 다들 바쁘시니,
      또 K모씨와의 시간도 잘 안맞으니까
      영화는 언제나 볼 수 있을까요...ㅠㅠ
      암튼, 힘 내시길~

  2. jasmine  2009/07/17 15:4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그분은 이번 여름방학에 아이들이 몰려와 집을 점령할지도 몰라요~~ 살인적인 그 일정에 저는 그저 돈 좀 작작 벌라고 했을 뿐... 그분은 시간 날 때 끼워 주고 나름 지역 주민인 우리들끼리라도 만나서 영화를 보는 것도 좋을 듯. 그분 기다리다간 한 편도 못 볼 확률 90% 이상~~ 되는 사람들끼리라도 영화를 보러 가도록 하여요~~

    • 마분지 2009/07/19 12:02  address  modify / delete

      근데...집에도 함께 극장 가기를
      고대하는 이들이 있어
      같이 가지 않으면 무사히
      살아남지 못할 듯...ㅠㅠ

  3. jasmine  2009/07/20 13:2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예쁜 가족들도 모두 같이 가요~~~ 그 통통한 뺨을 가진 소년을 만날 수 있으려나? 암튼 모두 함께 모여 영화를 볼 수 있는 행복한 그 날이 빨리 오길 꿈꾸며~^^ 오늘부터 저는 8월 말까지 인권 유린적인 학원의 일정 속으로....이렇게 공부를 해서 실력이 느는 인간이 오직 나 밖에 없으면 어떻게 하죠? ㅡㅡ; 열대의 한적한 섬에 태어났더라면 좋았었겠다 싶은 생각이....흑...

    • 마분지 2009/07/20 16:18  address  modify / delete

      ㅎㅎㅎ...
      인권유린적 업무의 여름날,
      건강히 잘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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