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볕

from 나날 2009/08/10 13:05


비가 올거라더니 연일 땡볕이다.

지난 주엔 부산에 잠시 다녀왔고, 다리가 아파 정형외과 치료를 받았다.
여태 아픈 적이 거의 없는 허리는 퇴행의 기미를 보인다고 한다.
무겁고 저리는 다리를 끌고 다니다 보니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잘 하는 게 걷는 일이고, 또 이리저리 걸으면서 구경하는 게 낙인데,
어쩌면 그것마저 부자유스러울 수 있겠다 싶어서.

암튼, 대단한 폭염의 날들이다.
그나마 하늘엔 구름이 지나가서 그걸 구경하는게 좋았다.
사진은 아파트 입구에 떨어진 그림자.



*



아이와 함께 갔던 광안리.
가로로 지른 광안대교의 선 하나가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대학 때는 해변에 6층짜리 모텔 건물이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거기에 커피숍이 있어서 과동기를 만나기도 했다.
밋밋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었다.
오래 전에 시조 시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건만
연락은 당최하지 못하고 지낸, 지금은 강릉에 살고 있을 그 친구는
잘 지내고 있는지 잠시 궁금했다.

역시 이번에도 아이가 바다에서 노는 것을 구경만 하였다.
바닷물에 몸을 담근 적이 언제였던가.




무거운 다리를 끌고 커피 한 잔 하러 나갔던 남포동.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지는 piff 광장에 가서
처음으로 길 바닥에 있는 핸드 프린팅을 살펴 보았다.
김기영, 정창화, 앙겔로풀로스, 이마무라 쇼헤이 등의 핸드 프린팅이 있었다.
다케시는 부산에 와서 술만 먹었는지 핸드 프린팅이 없다.
있었다면 기꺼이 사진을 찍어주었을 텐데.
위의 사진은 빔 벤더스의 것. 벤더스도 부산영화제에 왔던 모양이다.
사인에는 천사의 날개 같은 것을 그려넣었다.
그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가 생각이 났다.

고향이 부산이면서도 부산영화제는 가지를 못하게 된다.
추석에 귀성을 하게 되면 영화제를 보러가는 것이
이중과세 같은 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1회 영화제에는 우연찮게 들르게 되어 '나쁜 피'를 보았고
복도에 서있던 까락스를 얼핏 보았다.




하루는 아이를 데리고 김해로 갔다.
수로왕릉과 대성동 고분 박물관에 가서 이것저것 보았다.
3국시대라는 고정관념 아래  가야라는 연맹체의 의의가 통념적으로 폄하되지만
근래에 들어 가야의 본 모습과 의의를 찾으려는 노력이 많다고 한다.
아주 옛날에 잠시 들렀던 김해와는 달리
박물관도 많이 생겼고, 제법 볼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신라의 기마인물상에서도 보이는
저 말 엉덩이에 올려진 그릇은
도대체 뭐하는 물건인지 궁금하다.


*

부산에 있는 동안,
서울에선 구할 수 없는 해양문고를 사서 동안 읽었다.
'그림자 섬의 숨은 이야기'란 책인데 영도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그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어릴 때 그냥 지나치던 길들에 깃든 수 많은 사연들이 좀 더 생생하게 살아왔고,
어머니 집에서 보면 무심히 열려있는 그 수평선이 다르게 느껴졌다.
대마도로 후쿠오카로 배를 타고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철기와 그릇들이 오가던 길이었고
또 해적질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일들이 넘나들던 길이었다.
수많은 매혹적인 이야기들을 알고 있는 바다.
조만간, 배를 타고 수평선을 넘어
저편으로 한 번 가봐야겠다.


*

오늘은, 끝내지 못한 우울한 일기 편집을 마쳐야 할 것 같고
그것이 끝나면 좀 경쾌한 일기를 하나 편집해야겠다.
그리고 다큐를 위한 구체적인 스케줄을 다시 점검하기로.

몸이 무거우니 마음도 무겁다만,
오히려 즐겁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자연적인 치유가 잘되는 편이므로 병원과 거리를 두고 사는 편인데
다리가 아픈 건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직 천사는 날개가 없으므로 걸어다닐 수 밖에 없다.

덥다.
2009/08/10 13:05 2009/08/10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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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ni 2009/08/25 08:1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다큐 준비중이신가 보네요.. 저도 그냥 저혼자 해보려고 눈물이란 소재로 시나리오 써보고 있어요
    어디에 낼것도 아니고 혼자 한번 해보고 싶었던지라 .. 제 한계도 테스트해볼겸 해보려구요..

    전 이제사 손이 좀 움직일만 하니 세상에 남부러울게 없네요.. 역시 몸이 재산인가봅니다.
    오늘하루 좋은일 가득하세요...

    • 마분지 2009/08/25 14:54  address  modify / delete

      시작은 오래 전에 했는데, 진행이 지지부진했습니다.
      암튼, 올해에는 마칠 생각입니다.
      '눈물'이라는 소재의 다큐는 어떨지 궁금합니다.

      몸이 재산이라는 말, 실감하는 날들입니다.
      저는 요즘 다리가 좋지 않아 좀 우울한 기분...ㅠㅠ
      손이 자유로워 지셨다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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