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쿠(俳句) 몇

from 나날 2008/01/28 00:00


달이 밝은 밤
가난한 마을을
지나갔노라

月天心貧しき町を通りける

도끼질 하다
향기에 놀랐다네
겨울 나무 숲

斧入て香におどるくや冬木立

-요사부손(與謝蕪村)


*

눈 흩날리네
농담도 하지 않는
시나노(信濃) 하늘

雪るちやおどけも言へめ信濃空

봄비 내리고
잡아먹히려고 남은
오리가 운다

春雨や喰れり殘が鴨鳴く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
 
이 길이여
행인 없이 저무는
가을의 저녁

此道や行人なしに龝の暮

가을은 깊고
이웃은 무얼하는
사람들일까

秋深き隣は何をする人ぞ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지난 해 샀던 하이쿠집을 다시 펼쳐보았다.

번역이다보니 그 정감을 제대로 느낄 수는 없겠지만
가끔 참 좋은 것들이 있었다.
특히나 맨 위의 하이쿠를 읽을 땐 참 좋았다.

몇 해 전에 고향을 '여행'한적이 있었다.
말이 이상하지만 고향 집을 찾은 것이 아니라
마치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았다.
그때, 밤의 어둠 속에서 비뚤거리며 서로 코를 대고 있는
낮은 지붕들을 내려다 본 적 있었다.
그 때의 정경이 생각난다.

열 일곱자에 반듯이 맞춰 넣는 하이쿠는 참 일본스럽다.
그것이 보여주는 것, 느끼게 하는 것도 참 다르다.
우리의 짧은 시가인 시조는
초기의 완결된 구조 속에서도
내부에서는 움직임과 전개가 느껴지는데
하이쿠는 한 순간에 집약하고 멈춘다.

사진 없이 올리자니 심심하게 느껴져서
딱 맞진 않지만 옛날에 그린 눈 마을 그림을
가져왔다.


*

처음 카메라를 들고 내 속에 차오르던 어떤 감정들,
어쩌면 오만함, 어쩌면 시건방짐.
그런 감정들이 그립다.
비록 짧고 하찮은 것을 만들고 있을지 모르지만
늬들의 뭣과도 바꿀수 없어.
절대 늬들 앞에서 회개하지 않을꺼야,하던
그런 마음의 상태를 다시 떠올린다.

건방짐이 필요하다.
그것에 대한 댓가는 익히 알고 있다.
또한 그냥 건방짐에서 멈추면 안된다는 것도.


*

책을 읽다보면, 자주 발에 힘이 빠진다.
제대로 아는 게 없어 책을 읽긴 하지만,
공부해야할 것들이 한 없이 늘어나는 기분이 든다.
뭐든지 다 알고 시작하려든다면
결코 시작할 수 없다.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2008/01/28 00:00 2008/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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