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from 이야기 2009/09/07 19:58

수년 전, 다큐멘터리를 위해
일본의 고모님을 찾아 인터뷰를 하면서
증조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되었다.
그전까지 혈육에 대한 내 관심은 할아버지가 끝이었다.
어릴 때, 부자집 아이들을 편애하는 교사들을 보거나,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상처받은 어린 마음은 그 넓다는 할아버지의 땅을 상상하곤 했다.
사방 십리를 걸어야 남의 땅을 디딜 수 있었다던 넓은 땅.
그리고 사냥으로 소일하며 사셨다는 할아버지.
나는 그 땅이 대대로 물려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내 고모님을 인터뷰하면서
증조 할아버지가 손수 이룬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증조 할아버지의 별명은 '노랭이 영감'이었다고 한다.
십리 길이 넘는 장에 다녀오다가 아무리 소변이 마려워도
자신의 밭으로 돌아와서야 오줌을 누었다고 한다.
노랭이이긴 했지만 일개 소농이었을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 큰 땅을 가진 부자가 되었는지
고모님들도 그 내력을 모른다.
다만, 다큐멘터리를 위해 이런 저런 자료를 보던 나는
증조 할아버지가 치부하게 된 배경에
청일전쟁이 있지 않을까, 추측 해본다.
당시 일본군에게 물자를 공급하고 큰 돈을 번
조선인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증조할아버지가 사시던 평안북도 용천은
일본군의 이동경로와 가까운 곳이었다.
그런 일을 통해 마련된 돈으로 대금업을 시작해서
수많은 논과 밭을 소유하게 되지 않았을까.

물론, 순전히 내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사회적인 격변이 가져다준 어떤 기회가 아니라면,
구한말, 일제초기의 소농이
300백 정보, 90만평에 이르는 땅을
소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혼란스런 시절을 이용해서 재산을 늘린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민족의 고통을 통해 치부한
반민족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사람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증조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신선하게 들렸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유전자가
내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형제들은 현실적인 무언가를 추구하고
또 끈질기게 꾸려가는 일에는 젬병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이용해 치부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하지만, 집안의 어른 중에 현실의 기회를 포착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아는 이가 있다는 것은
내게 참 의외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하고 해방이 되자
38선이 생겼고 곧 북에서는 지주를 숙청했다.
증조 할아버지는 평생을 가꾸어온 땅을 모두 잃었다.
그래서 안과 겉이 모두 새까맣게 타들어간 증조할아버지는
어느 날 마루에 누워서 아들, 즉 나의 할아버지에게
담뱃대에 불을 당기라고 했다.
그리고 몇 모금을 빨고 나서는
'이것도 아니야' 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평생의 수고로움은 모두 허사가 되었고,
오랜 위안이던 담배마저 쓴맛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 내외에게 교회에 나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

할아버지의 얼굴도 사진도 본적 없는 내게
증조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까마득한,
말하자면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다큐 편집을 위해 인터뷰를 다시 보면서
내가 아는 우리 집안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한 사람,
끝내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지만
집요하고 끈질긴 노력으로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했던
특이한 한 사람의 이미지를 그려보게 된다.
내 속에도 그런 유전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면서.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을 내 좁은 생각 속에  
가두고 사는 지도 모르겠다.







2009/09/07 19:58 2009/09/0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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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ni 2009/10/01 18:3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몇달전 인디 스페이스 전용극장에서 봤던 내용하고 비슷한 맥락인거 같은데.. 설마 그작품이 ~ 혹시?

    갑자기 제목은 생각이 안나는데.. 6.25 시점으로 그리고 동네 주민 들 인터뷰 하면서 감정의골을 찿아서 가보는 ~ 그런내용 이었던거 같습니다.. 명절 즐겁게 보내시고.. 건강잘챙기세요.. 전 일합니다.. 뭐 수당은 따따불이지만 ..~ ^^

    • 마분지 2009/10/03 03:17  address  modify / delete

      어떤 다큐였는지 잘 모르겠네요.
      요즘 영화나 다큐를 잘 안보고 지내다 보니...
      제가 만드는 것은 조금 애매하게 보일 것도 같습니다.
      진보적 이야기가 많이 드러날 것도 아니고
      TV다큐적인 감정들이 별로 묻어날 것 같지도 않고...
      좀 덤덤하고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따따블의 수당이라...
      부럽기도 하고 또 심심하시겠단 생각도 드네요.^^
      암튼 추석 잘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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