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수 없는 포도

from 나날 2009/09/21 13:52


아파트 출입구에 누가 심었는지, 포도나무가 한그루 있다.
하지만 그 열매는 도무지 먹지 못할 것 같다.
9월이 되었지만 저렇게 한 송이에 퍼런 포도알 몇몇을 품고 있을 뿐.

나는 어쩌면 내 그릇에 맞지 않는 꿈을 가졌고
내게 걸맞지 않는 큰 것을 열망하고 살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밤의 불빛이 끝나는 곳의 아득함을 보게 하고
버려진 얼굴들에 드리워진 심연에 눈길이 머물게 했을까.
그저 나는 그것을 직감하고 볼 수 있을 뿐,
더 나아갈 힘과 의지는 애초에 지니지 못한 사람이 아닐까.
마음 속에서 다시 살아난 기억들,
그리고 내 눈으로 들어와 깊이 곳에 남은 것들에 대해
내가 어떤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누가 내게 심어놓은 생각일까.

수많은 밤, 내 곁을 유령처럼 배회하던 기억들과
떠나지 않는 의식 언저리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표정들.
그 모두를 끌어안고 보듬는 것을 업으로 삼기에
나는 무력한 존재.

그러므로 누군가 내게 다가와 해명할 것이 있다.
그것이 신이건, 한때 나를 안다고 했던 어떤 사람들이건
밤의 어둠 속에 숨은 어떤 존재건,
사람의 작음을 한 없이 비웃는 머리 위의 악령이건.

이것은 나의 분노이고 한탄이고 기도이다.
어둡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을 때에야
비로소 구원이 시작될 거라는 투의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껏해야 나는 먹지도 못할 퍼런 열매를 겨우 맺은
포도 한송이.







2009/09/21 13:52 2009/09/2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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