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이야기 2009/11/05 17:46

돈은 버는 것이었고, 또 쓰는 것이었고
받는 것이었고, 주는 것이었다.

과연 돈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폐와 동전, 혹은 통장의 숫자로 익숙하지만
사실은 얼굴이 없는 돈.

자본의 은총 없이는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세상에 살면서
그런 질문을 심각하게 해보지 않았다.

내 주머니에 있는 지폐 한 장 속에는
어떤 삶의 고통이 들어 있는지,
그래서 내가 사 먹을 수 있는 한끼의 밥에는
또 얼마나 많은 어둠들이 스며 있는 것인지.

수입 쇠고기 문제로 시끌벅적 하던 즈음,
쇠고기를 먹는 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했던 이야기가
비유적인 이야기를 넘어서는
섬득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쇠고기의 대량생산을 위해 사라지는 숲과
그래서 생존의 터전을 잃는 사람들과
또 다가오는 전지구적 위험과
죽어가는 작은 삶들.
고기를 먹는 다는 것은 정말
남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지 않은가.

채식을 하고 싶어졌지만
습관은 가끔씩 고기를 먹게 한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압박해오는 삶의 강도들은
또 고농도의 단백질을 요구하게 만든다.
사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생명을 먹는 것이다.
그것이 육류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일뿐이다.
식사 전의 감사기도는
사실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놓은
존재들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암튼,
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돈 문제에 시달려서도 그렇지만
돈으로 인해 피차에 발생하는 고통 때문일 것이다.
내가 술값을 내고 커피를 마시는 돈에는
냉혹한 사채업자에게서 온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래, 제 3 세계의 아이들에게 가야할 것을
훔쳐온 부분도 있을 것이다.
돈이라는 이름 아래 생략되어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내가 얼굴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고통이고
영악한 자들의 간계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죄'라는
어거스틴의 통찰은 옳은 이야기이지만,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성자가 될 수는 없는 일.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써야 한다.
돈을 벌고 돈을 쓴다는 현실,
그 아래의 어두운 이야기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한다.

자본에 기대어 무언가를 표현하고 만든다는 것은
그 어두움에대한, 특히나 그렇게 스러져간
삶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하지 않은가.

돈에 대해 그렇게 절망적인 생각으로
인생을 마감했던 브레송은
너무도 고결했다.


*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읽고 있다.
20년도 더 전에 읽은 것인데
다시 읽으니 재미있다.
당시에는 스탕달의 '적과 흑'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는데.

2009/11/05 17:46 2009/11/05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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