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꼭또는 말했다
'모든 사람이 동쪽으로 갈 때 그는 혼자 서쪽으로 갔다.'
(동쪽과 서쪽이 바뀌었던가? 가물가물)
그리고 그의 삶을 되짚어 다른 이에게 적용될만한
단언같은 것을 덧붙였다.
'젊은 이는 확실한 증권을 사서는 안된다.'

에릭 사티(Erik Satie)에 관한 말이다.
프랑스의 작곡가, 카페의 피아노 연주자.

*

그의 '짐노페디'는 이제는 많이 알려졌고 흔한 곡이 된 감이 있다.
이미 광고의 배경음악으로도 몇 번 쓰인적이 있다.
하지만, 짐노페디를 처음 들었던 1985년,
나는 뭐 이런 음악이 다 있지,라면서도
전혀 강요의 기색이 없는 그 음악에 오히려 붙들리고 말았다.

처음 들었던 연주에 의해 그 곡의 이미지가
한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짐노페디의 경우도 조금은 그러했다.
그렇게 느린 사티를 나는 아직도 들어본 적이 없다,
레인버트 디 레우(Reinbert de leeuw)라는 콧수염 난 양반의 연주였다.
처음 나는 그것이 사티의 당연한 템포로 여겼다.
그런데 그 후로 다른 연주들을 들어본 결과,
과장을 하자면 거의 두 배 정도는 느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때는 저녁이었고,
아마도 5월이나 6월 정도였을 것이다.
당시, 카세트 라디오를 끼고 살았던 나는
FM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몇 개의 음표가 공중을 떠 다녔고
멜로디와 화음이 구분되지 않는 피아노 음이
툭툭 방안에 던져지고 있었다.
때마침 자취방의 창은 열려있었고,
밖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개가 짖는 소리,
저녁 거리를 팔러 나온 리어카 행상의 목소리,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들리는
멀리 제기동(祭基洞) 성당의 저녁미사 종소리도 거기에 섞여 들었다.
작은 카세트에서 내뱉어진 피아노 음들은
그 저녁의 온갖 소음들과 섞여서
하나의 음악이 되었다.
드문드문 던저진 음표들 사이로 끼어들던 소음들,
그것이 전체가 되어 이루던
저녁의 음악.

*

그 무렵 학교앞의 레코드 가게에는
싸티의 디스크가 진열되었고
그것을 손에 넣는데는 3년이 걸렸다.
그러고도 나의 방에서 듣는데는 몇 달이 더 걸렸다.
플레이어를 나중에 장만했던 것이다.

*

그 후로 구십년대를 넘어가면서
사티는 그 템포 그대로, 여전히 남들과 반대방향으로
어디론가 천천히 걸음을 걸어가고만 있었지만,
조금 달라진 것은 있었다.
사티가 차츰 밤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늘에 점점이 뿌려진 별들이 걸음을 옮기는듯
아주 느린 템포로.
어느 작가가 말한 모래 위를 걸어가는 코끼리 걸음처럼,
사티는 긴 빌로드를 끌고 뒷모습을 보이며
별들의 템포로 저기저기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끌리다라는 프랑스 연주자의 CD를 사게 되었다.
좋은 연주였고 거기서 "너를 가지고 싶어'왈츠라는
좋은 곡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당연히 여기고 있던 사티의 템포보다
연주가 한결 빠른 것이었다.
나는 나의 템포감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구라,라고 느끼기 시작했고,
그 생각은 피콜리니의 연주를 들으면서
확실함으로 굳혀졌다.

*

여전히 위세 있던 낭만주의와
부상하던 인상파에 반기를 들고
반정통적, 반시류적 걸음을 걸어갔던 싸티.
카페 연주자로서 살았던 싸티.
강요하는 전통에 자기를 맞추기보다
자기 속에 흐르는 음악으로 길을 삼았던 사람.
그러면서도 끝까지 그렇게 걸어갔던 사람.
꼭또가 말한 서쪽으로 갔다는 것은
그러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의 반항아적인 성격,
기괴한 행동들과는 어딘지 거리감 있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그가 걸어갔다'라는 말에 나는 감동을 하게 된다.
싸웠다,라는 것이 아니라 걸어갔다,인 것이다.
자기의 소리가 열어주는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사람은
싸우는 사람과 다르게
동서남북 어디가 유리한가를 재지 않는다.
마음이 여는 길을 따라 갈 뿐이다.
그리고 걸어가는 한은 멈추지 않으므로
확실한 증권 따위에 염을 두지 않는다.

그런 걸음걸이.

*

다시,콧수염 양반의 연주를 들은 것은 3년 전이었다.
나는 차를 몰고 강북강변을 달리고 있었고
라디오에서 짐노페디가 나왔다.
아주 오랫만에 느린 템포의 사티를 들으며 운전하는 동안
나는 강변의 불빛들과 함께 별들의 운행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여러 사티를 듣게 되면서도
내 마음 속에는 그 콧수염 달린 양반의 연주가
그대로 남아있다.
비록 처음 듣던 날 저녁의 소리는 흐려지고
사막의 밤이라던가 별의 이미지들이
그 느린 템포 사이사이에 끼어들어와 있지만,
사람들이 연상하는 밤의 나선 계단이나 회랑같은
내부로 천천히 소용돌이치는 그런 어둠은 아닌 것이다.
사막이라 하더라도 별빛이 빛나는 열린 하늘.

*

오늘도 나의 사티는 
별들의 템포로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전혀 멀어지지 않은 뒷모습으로.
그의 발걸음이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고
그것은 별들과 모래와 어둠과 그 모두와 하나로
음악이 된다.


*

걸어간다는 것
나침반을 대신할 빛나는 별의 소멸을 이야기 된지도 오래되었지만,
자기 속에서 음악이 만드는 길을 걷는다는 것,
어쩌면 자기의 깊은 속에 있는 별빛 같은
음악을 따라간다는 것.

그러한 걸음 걸이.


2002.12.5


gnossienne 2 / erik satie (piano: pascal roge)

2002/12/05 00:00 2002/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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