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픽(pick)을 잡고
기타 스트로크를 연습하고 있다.
아직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리고 20년만에 반음계 스케일을 연습하는데
왼손이 욱신거리고 아프더니 좀 나아졌다.
왼손가락 끝에 굳은 살이
다시 잡히기 시작했다.

*

한대수의 '하루 아침' 악보를 구하려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아주 오래된 인터뷰를 발견했다.
한대수가 다시 한국으로 오기까지
그는 여기로부터 버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일본의 어떤 음악 페스티벌에 초대되었고
이상하게도 그 계기를 통해
다시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거장'으로 대접을 받는다.

대학 다닐 때 '메아리'라고 하는
서울대에서 나온 노래집을 보며 노래하곤 했는데
거기에 한대수에 대해
개인주의적, 히피적, 미국적 정서를 버리지 못한
한계를 지닌 가수로 기록하고 있었다.
어쩌면 거기서 이미 386의 한계는
드러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암튼, 당시의 상황을 읽게되니
재미있다.




*




멀고 먼 길을 걸어온 나그네의 회고담: 한대수와의 인터뷰(1)
신현준 homey@orgio.net


날짜: 2002년 10월 3일
장소: 서울 연희동 한대수의 거처
질문 및 참석: 신현준, 최지선. 김형찬, 송창훈
정리: 송창훈, 신현준, 배성록, 이성식



한대수와의 만남. 나같이 그의 음악과 더불어 성장한 사람에게는 가슴 떨리는 일이다. 그와의 만남이 전화 한 통화로 이렇게 수월하게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였다. 그가 서울에 올 때 머무는 연희동의 주택으로 찾아갔다. 1970년대 이전에 지어진 듯한 오래된 주택가에 위치한 집은 마치 “옥의 슬픔”에 나오는 집을 연상시켰다. 한적하고 조용한 오후였다.

그곳에서 4시간에 가깝게 한대수에게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었다. 그래서 1년이 지난 지금에야 정리가 끝났다. 1년 동안 이 일만 한 것은 아니지만, 몇 번이나 정리하려고 시도하다가 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분량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A4로 5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을 녹취하는 일은 장난이 아니었다(지금 군에 가 있는 송창훈에게 감사한다). 둘째는 정리 과정에서 문체를 어떻게 정할지 곤혹스러웠다. 경상도 방언과 영어 발음의 영향이, 존대말과 반말이 뒤섞인 그의 독특한 발음을 ‘표준말’로 정리하면 전혀 한대수의 느낌이 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인터뷰 때의 발음 그대로 옮기면 독자가 읽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뒤섞어서’ 절충하는 것을 차선으로 삼았다.

사실 한대수에 대한 이야기는 책이나 영상 등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어느 정도는 알려졌다. 일반 대중이 모두 아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충 알 정도는 되었다. 그래서 변별력 있는 인터뷰가 되기 위해서 ‘음악 이야기’와 ‘사실관계의 확인’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그의 삶과 생각에 대한 ‘재탕’보다는 이게 차라리 소중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인터뷰 당시의 관심이 ‘1970년대’에 집중되어 있던 탓에 [멀고 먼 길](1974)과 [고무신](1975)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는 차후에 보완할 기회를 찾도록 하겠다. 한대수는 아직 ‘은퇴’한 인물이 아니니까.


“다들 놀랐지 뭐. 첫 곡인데다가, 전주도 없이 바로 “물 좀 주소~!”하고 나오니까 놀랬지”:
[멀고 먼 길]에 대한 이야기


Q: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거인 한대수 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대수 님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자서전도 있고 다른 책도 있어서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가급적 오늘은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 위주로 여쭤 보겠습니다. 우선 1집 [멀고 먼 길](1974)과 관련된 질문을 드려 보죠. 먼저 1집에서 기타를 연주한 임용환 님은 어떤 분이신 가요? 저희가 갖고 있는 자료에는 ‘한국가요제’에서 두 분이 함께 연주했다는 내용도 있던데요(주: 이때는 잘 몰랐지만 임용환은 양병집 등과 교류하면서 명동의 르실랑스 등에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1973년의 청평 페스티벌에서는 양병집, 임용환, 최성원(!) 등이 한 팀을 이루어 노래를 부른 일도 있다. 이후의 그의 경력에 대해서는 한대수가 직접 이야기해 줄 것이다)
- 그렇지. ‘한국가요제’에서 우리 둘이 연주를 했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나? 야. 보통 연구를 해 온 게 아니네. 둘 다 기타 치고, 나는 톱을 하고 임용환이는 하모니카를 불고. 임용환이 기타가 재밌지. 1집 녹음할 당시에는 기타 (잘) 치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 지금은 세션이라 하면 유능한 사람이 10명 이상은 되지만 그때는 한 명도 없었어. 원래 임용환 씨는 내 팬이어서 음악이 좋다고 따라왔는데 내가 보니까 기타를 좀 치더라고. 원래 자기 혼자 집에서 기타를 즐겨 친 사람이야. 그래서 무진장 연습을 시켰지. 내가 입으로 음을 불러주면 그걸 기타로 치더라고... 그런데 스타일이 아주 특이해. 안 그런가? 나중에 나하고 헤어진 이유는 이 친구가 어느 날부턴가 크리스천이 되어서 자기는 가스펠만 하겠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뉴욕에 있을 때 임용환 씨가 1980년대 초반인가 뉴욕에 왔다고. 거기서 몇 번 만났는데 서로 거리가 멀어졌어. 내(한대수)가 하는 음악은 세속적인 음악이고, 자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밖에 안 하겠다고 해서.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별로 관계가 없어졌어. 그래서 임용환이 참여한 음반은 1집 [멀고 먼 길]이랑 4집 [기억상실](1990)에서 한 곡 부른 게 다인기라.

Q: 기타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여쭤보겠습니다. 한대수 님의 포크 기타 코드는 기본적으로는 간단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온 악보나 이정선 씨가 채보한 악보를 보면 코드들이 베이스를 달아서 나오는데, 그건 한대수 님이 붙여주신 코드인가요, 아니면 임용환 님이 기타 플레이를 그렇게 한 건가요?
- 방금 말했듯이 내가 임용환 씨에게 이래이래 휘파람으로 음을 불러준다고. 그러면 자기가 손으로 옮기는기라. 그런 식이었지. 그리고 “사랑인지”에서 쓰인 메이저 쎄븐쓰, 마이너 쎄븐쓰 같은 코드도 내가 지정해 준 것이지. 물론 리드 기타니까 내보다 훨씬 잘 치지. 나는 코드, 피킹 정도 하는 수준이고. 임용환 씨는 상당히 특이한 스타일이야. 내 첫 음반 하고 나서 그 분이 좀더 자기의 음악 세계로 갔으면 했지.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상당한 신자라서 가스펠 쪽으로 가는 바람에... 어느 정도였냐면 ‘가스펠 아니면 안 하겠다’는 분위기까지 갔다니까.

한대수의 데뷔 음반 [멀고 먼 길]의 커버 중 일부. 일그러진 시대, 젊은 영웅의 일그러진 자화상.

Q: 2집 [고무신](1975)은 엄진 님이 제작자로 보이는데, 1집 음반을 제작한 분은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또 권용남 님이나 정성조 님, 조경수 님은 어떤 계기로 음반에 참여하게 됐는지도 알려주세요.
- 1집은 신세계에서 만들었는데 김진성 씨가 날 데리고 왔으니까 김진성 씨 공이 크지. 권용남 씨는 나하고 친해서 참여한 경우예요. 그분은 (신중현과)엽전들하고 히 식스도 했어. 그 당시 드럼으로선 최고였지. 정성조와 조경수 등은 김진성 씨가 데려온 거 같은데 정확하게는 모르겠구만. 조경수는 인물도 좋고 해서 나중에 가수 됐잖아(주: 조경수는 탤런트 조승우의 아버지다). 정성조 씨는 나중에 재즈 클럽에서 한두 번 만났고, 뉴욕 거리에서 한번 만나고 그게 다야. 그 음반 이후로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어.

Q: 제작자는 김진성 씨겠지만 ‘프로듀서’라고 할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보통 한대수 님 음반에는 편곡자나 프로듀서가 따로 표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직접 맡아서 했다고 보면 되는 건가요?
- 그래, 전부 다. 그런데 간혹 프로듀싱이 있는 것이, 3집 [무한대](1989) 때 송홍섭 씨가 몇 곡을 편곡한 게 있지. [기억상실] 때는 잭 리(Jack Lee)랑 에드 매과이어(Ed Maguire)랑 나, 이렇게 셋이 알아서 한 것이고.

Q: 1집 음반은 첫 작품이라 녹음 당시에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녹음기간도 짧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특별히 기술적인 문제는 없으셨는지요?
- 1집 녹음은 하루 만에 다 끝냈어. 완전히 하루 만에 끝냈어. 더빙 같은 건 거의 없었고, “물 좀 주소”만 좀 있었어. “물 좀 주소”가 트랙으로 한번 가고, 내가 다시 기타 치면서 노래 불렀지. 다른 곡들은 노래 부르고 연주하고 동시에 다 했어. 당시에는 내가 녹음이라는 걸 아무 것도 몰랐어. 녹음이라면 무조건 다 한꺼번에 가야 하는 줄 알았다니까. 녹음을 해 봤어야 알지. 첫 녹음인데, 그 때야 음악 하는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 멀티트랙 레코딩이란 것을 난 몰랐어. 네 트랙이 뭐가 필요한지 몰랐고, 지금 뭐 48트랙이라면 48번 입힐 수 있다는 거 알잖아. 그런데 그때는 녹음기 자체를 가진 사람도 별로 없으니까.

Q: 아마도 그 당시에는 녹음에 대해서 한대수 님 말고도 다들 잘 몰랐을 겁니다. 대체로 한방에 가는 녹음이었으니까요.
- 그렇지. 트로트 같은 음악이나 반주 깔고 노래했지, 그룹 사운드는 다 한 번에 갔다고. 그런데 “물 좀 주소”는 달랐어. 왜냐하면 정성조 밴드가 연주를 하러 왔는데, 기타가 ‘짝짝’거리는 소리를 내야 하는데 그걸 못 하는기라. 여러 번 해도 그 소리가 안 나. 그래서 정성조 씨 기타리스트(이름은 까먹었는데) 그 사람보고 ‘이래이래 해주이소’ 했는데 그 사람도 자기 고집이 있잖아. 결국 안 되더라고. 그 사람이 ‘차라리 당신이 쳐보쇼’하는 거야. 하하하. 하나도 안 어려운 건데, 개념을 모르는 거야. 그래서 이제 내가 직접 손수건을 기타 줄 안에 끼고 제일 뒤에 있는 픽업만 쓰고 짹짹거리면서...

Q: 그런데 1집에서 “물 좀 주소”는 밴드와 함께 한 록 음악 스타일의 편곡이고, 나머지는 주로 통기타 음악이지 않습니까? 다른 음악도 록의 편곡으로 하고 싶었던 건데, 조건이 안돼서 그렇게 한 건지, 아니면 “물 좀 주소”만 특별히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건지 궁금하네요.
- 사실 다른 곡도 몇 개 더 그렇게 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렇게 하면 녹음을 하루 만에 할 수가 없지. 적어도 3일은 잡아야 되겠지. 그런데 그 당시에 녹음이란 것이 하루 이틀 만에 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나야 전부 다 좀 화려하게 하고 싶었지. 그런데 그 중에 “물 좀 주소”만큼은 통기타로 안 되겠더라고. 그 곡이 근본적으로 록인기라, 아무리 생각해도 통기타만으로는 되지가 않더라고. 그래서 그거만이라도 록 편곡을 가미한 것이지. 그래서 “물 좀 주소” 녹음하는 데만 두세 시간 걸렸어.

Q: 당시 통기타 음악인들은 통기타만으로 순수하게 해야지, 록과 접목하는 것은 변절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나요?
- 나는 장르에 대해선 전혀 신경을 안 쓰는 편이야. 지금도 그렇고 나는 내 음악을 하는데 있어서 주위의 반응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안 쓰지. 내가 내대로 충실히, 내 주위 훌륭한 음악인들과 충실한 소리를 만들면 다른 이들도 언젠가는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기라. 설령 이해를 안 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오케이라 그 말이지. 하하.

Q: 주위에서 “물 좀 주소”를 듣고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없었나요? 사람들이 한대수 님 음악을 대개 통기타 음악으로 알고 있었을 텐데요. 곡 자체도 리듬감이 있고, 보컬 자체에 디스토션이 걸려 있어서 한대수 님의 이전 음악과 비교해 특이한 곡이었던 것 같습니다.
- 다들 놀랐지 뭐. 첫 곡인데다가, 전주도 없이 바로 “물 좀 주소~!”하고 나오니까 놀랬지. 전주 없는 음악으로는 첫 케이스인기라. 목소리부터 나오는 곡이 별로 없을 거라 아마. 그건 내가 고집을 했지. 음반을 만들 때마다 어떤 색채가, 오리지낼리티가 있어야 하거든. 다른 음악을 들어보니 전부 다 전주가 나오고 나서 목소리가 나오더라고. 목소리 먼저 나오는 곡은 별로 없어요.

Q: 자서전에 보니까 밴드들이 한대수 님의 의도대로 잘 따라하지 못해서 화를 많이 내셨다고 하던데요. 한대수 님은 통기타 분위기로 하려고 했는데, 밴드들이 너무 세게 연주해서 의견이 안 맞았다는 의미인가요?
- 아니, 반대인기라. 원래 “물 좀 주소~!”하고 세게 나가는 건데, 너무 안 되니까 마지막에 겨우 박자 맞춰서... 하이구. 너무 약하게들 해서 문제였지.

Q: 그 독특한 소리는 그 날 생각해 낸 건가요? 예전에 그런 비슷한 사운드를 어디서 들으신 적이 있었는지요?
- 그게 그 소리가 갑자기 생각나더라니깐. 그게 들어가야 노래가 되겠더라고. 예전에 들은 적은 없지. 한번 다시 들어봐요. 그게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니까. 그게 만약 '짹짹'거리지 않고, '꿍치지 꿍치지' 이러면 재미없단 말야. 이게 리듬을 맞춰준다고.

Q: 당시 스튜디오의 녹음비는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처럼 ‘프로’ 단위로 되어 있었는지도. 또 과거에는 엔지니어들이 권력이 있고 고압적인 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녹음하는 동안 엔지니어들이 한대수 님의 음악 세계를 잘 이해하고 소화해 주던가요? (웃음)
- 그건 사장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김진성 씨가 잘 알 거야. 그 사람이 제일 정확해, 오히려 나보다도 잘 기억하지. 그런데 당시 녹음할 때 테이프 값이 얼마나 비쌌는지 몰라. 우리나라가 못 살 때였거든. 특수 수입 테이프란 말이지. 그니깐 녹음한다는 것 자체가 완전히 큰 영광이었지. 그 시절에 엔지니어래봐야 몇 명 되겠노? 기계 다룰 줄 아는 양반이 우리나라에 두세 명밖에 안 됐을기라. 그 사람들이야 하이고, 하나도 이해를 못하는기라. ‘이게 뭐꼬, 이건 또 뭐꼬’ 그러지. 하모니카 삑삑 불어대면 ‘이거 뭐 하는 놈이냐’...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 가운데 녹음한 음반인데, 아무 것도 안 나온 거는 아니잖아. 완전 기적인기라, 이건. 미리 맞춰보고 연습하고 한 것도 전혀 없이 곧바로 들어갔다고. 나하고 임용환이 뿐이었니까 악보 같은 것도 안 가지고 들어갔다고. “물 좀 주소” 때문에 다소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서도...

Q: 그러면 “바람과 나”에 있는 피아노 연주나, 그 외의 곡들에서 정성조 님의 키보드, 오르간 같은 연주도 즉석에서 이루어진 것인가요?
- 그건 아니지. 피아노 코드 정도는 가르쳐 줬었지. 아, 생각해 보니까 악보도 있긴 있었네. 물론 정확하게 다 어레인지 된 건 아니고, 마디 있고 코드 있고 가사 적혀 있는 정도지. 정성조 씨 연주는 인자 즉석에서 했지. 그건 정성조 혼자 한 방에 가버린기라. 원 테이크로 한번에 간 것이고, 올갠이 코드를 받쳐주는 거니까 특별히 기교를 부리고 한 건 아니지.

Q: 정성조 님은 이를테면 김민기 님 데뷔 음반에서 연주한 것을 보면 플루트 소리가 유난히 두드러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대수 님 음반에서는 뒤로 물러나서,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아스라한 느낌을 주거든요. 이것도 의도한 것인지요.
- 난 그때 이런지 저런지 몰랐어. 그냥 치다보니까 그렇게 된 거야. 지금은 계획도 짜고 의도적인 게 많은 편이지. ‘이런 효과도 넣자 빼자’하는 식으로. 그런데 그때는 처음이라 난 녹음이 뭔지도 몰랐다니까. 준비 전혀 없었지. 내하고 임용환이하고 최동휘(첼로)까지는 준비가 됐지만, 그 나머지 사람들은 무얼 어떻게 하는지 어떤 소리로 녹음되는지 모른기라.

Q: 녹음하시면서 정성조 님 스타일의 연주들이 맘에 안 드시거나 불편한 점은 없었나요? 저희의 편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서로 스타일이 안 맞는 부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 그 때 맘에 들고 안 들고가 어딨나. 녹음 한번도 안 해봤는데 알게 뭐꼬. 생판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한 거야. 근데 한 가지 느낀 것은, 최소한 ‘들을 만’은 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정성조 씨 3절부터 임프로바이제이션 나갑니다” 이래 말만 해 버리면 바로 가는 거지. 2절이나 3절에 건반 같은 다른 악기들이 더해지지? 나는 항상, 지금도 그런 식인기라. 지금도 [Eternal Sorrow](2000) 들으면 그렇잖아. 그게 내 스타일인기라.

Q: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사전 어레인지먼트(편곡) 없이 녹음한 셈이군요. 그렇게 하루만에 녹음하려면 아무래도 의견 충돌이 없지는 않았을 것 같은 데요. 연주자들이 대체로 한대수 님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었나요?
- 임용환이랑 내하고는 연습을 항상 했잖아. 나머지 뭐 있나. 올갠 코드 받쳐주는 거 조금 있고, 피아노 약간 쳐주고. “물 좀 주소”만 다른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뭐. 그라고 대체로 내가 해 달라는 대로 해주더구만. 그 사람들이 나한테 이견을 안 내세우는 거겠지. 베이스 칠 때 조경수 같은 경우도 베이스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쭉 밀어야 하니까, 주문대로 하자면 손이 아팠을 텐데 인자 그렇게 해달라고 하니까 해달라는 대로 했지. 조경수는 자기가 해야 할 연주가 끝난 뒤에도 앉아서 쭉 지켜보다가 “청산유수군요” 하더라고.

Q: 저희가 듣기로는 “물 좀 주소”에 나오는 카주 연주가 한대수 님 목소리와 비슷하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카주라는 악기를 선택한 것인지요.
- 왜 카주를 했는가 하면, 불기가 쉬운기라. 아무나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사실상 내 희망사항은 색서폰이 들어갔으면 좋겠더만, 색서폰이 없는기라. 정성조 씨가 색서폰도 하는 줄 몰랐던 거지예. 그 양반을 원래 플루트 연주자로만 알고 있었지. 그래서 카주가 들어간 거지.

Q: “사랑인지”에 나오는 딸랑이 소리도 독특합니다. 어떻게 착안한 건가요?
- 내 그 때 신문로에 살았는데 한국식 집인지라, 중간에 마당도 있고 우린 이쪽에 살고 앞집에는 다른 식구 사는 식이었지. 중간에 물 호스도 있고. 근데 그 때 우리 앞집에서 애를 낳은기라. 아기 딸랑이 소리가 어째 감미롭게 들리더라고. 그래서 아침에 녹음실 나오는데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들고 갔지.

Q: 음반 정보에는 스틸 기타도 치신 것으로 나오는데요, 놓고 치는 기타 아닌가요?
- 그게 엄밀히 얘기하면 스틸 기타는 아니고, 젓가락으로 기타를 뉘어 놓고 친 거지. 마치 스틸 기타처럼... 스틸 기타라고 하면 다른 기타를 생각할텐데, 아무튼 기타를 무릎에 눕혀놓고 젓가락으로 때렸다, 이렇게 설명하느니 그냥 간단하게 스틸 기타라고 해 버린 것이지. 어떻게 다른 말로 표현하기 힘들더라고.

거장의 멀고 먼 길, 그 뒷모습. 맨 위 사진은 한대수의 첫 번째 부인 김명신이 찍은 20대 시절로, 이는 [멀고 먼 길] 재발매반의 커버에 쓰이기도 했다. 중간과 아래 사진은 김한성수가 찍은 50대 초반의 모습(2000).

Q: 좀 다른 질문인데, 1집 음반에 나오는 ‘혼자 걸어가는 뒷모습’ 사진은 촬영 장소가 어디인가요? 예전에 찍어놓은 사진이었다고 들었는데요.
- 거기가... 우리 ‘첫째 마누라’가 찍은 건데, 걸어가면서 자기가 하나 찍고 싶다고 하대. 그 날 놀러가서 우연히 찍은 사진이지. 거기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분명 서울은 아니야. 저기, 강원도 하루 만에 갈 수 있나? (질문자: 지금이야 가죠.) 그 당시에는 못 갔지? 그럼 강원도도 아니야. 하루 만에 갔다 온 거리니까 경기도 어디일 거야.

Q: “인상”의 가사를 보면 굉장히 암담한 내용이 나옵니다. “거짓에 무너진 옛 세상이 / 해지기 전에 잠든 운명이 / 내 눈앞을 막고 있네”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당시 어떤 심정을 표현한 겁니까? 저희가 보기엔 그 당시에 한대수 님이 한국 사회 오셔서 느꼈던 개인적인 암담한 심정이 담겨 있다고 보는데요. 그리고 낮게 깔린 첼로 연주도 그런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일환이라고 보이구요.
- 그렇지. 나는 모든 사회가 거짓이 있다고 보거든. 로마 제국을 보더라도 마지막에 상당히 좀 임모럴(immoral)해진 점이 있고. 모든 제국이 결국 나중에 파멸될 때는 거짓이 많아진다고 나는 본다고. 섹슈얼리티라든지, 파워, 권력, 남녀관계 위치의 바뀜 등 전부 거짓이 된다고 느꼈어. 어느 사회나 거짓이 많지 않은가. 부패를 비롯해서 그 당시 우리나라 사회에도 거짓이 많은 것 같았고, 그런 모든 점을 이야기한 것이지. 지금도 사실 많지, 뭐.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지만. 근데 그때 어린애 치고는 상당히 큰 주제를 다룬 셈이지. 특별히 긴급조치나 유신 때문에 만든 곡은 아니고, 아마 1969년에 만들었을기라. 그 곡은 구상은 미국에 있을 때 했고 완성한 것은 한국에 와서니까. 내 한국 왔을 땐 이미 분위기가 답답했지. 그 때는 장발인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내 머리 보고도 뭐라고 그러고. 아까 좋은 지적 하셨는데, 첼로 소리 묵직한 것도 그런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예.

Q: “행복의 나라”에서 베이스 기타는 일렉트릭을 쓴 건지 어쿠스틱을 사용한 건지 궁금합니다.
- 통기타, 제일 낮은 줄 두개로 한 것이지. 사실 내가 제일 필요한 것이 콘트라베이스였는데 찾기도 힘들고, 연주해 줄 사람도 찾기 힘들고, 돈도 없고... 그래서 임용환이 보고 “이거 칠 때 제일 낮은 거 두 음만 써라” 그래 갖고 베이스 런(run)을 하라고 말한기라. 그걸 넣은 다음에 콘솔로 만지면 콘트라베이스음이 나오거든. 아, ‘이렇게 하면 베이스 소리로 들리는구나. 우리 성공한기라’라고 생각했지.

Q: “하루 아침”이란 곡은 음반사 측에서 그 곡 때문에 음반 전체가 금지될까 해서 일부러 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 윤(상호) 사장이 그건 안 되겠다고 하더라고. 심의 통과가 안 될 것이라고 지레 겁먹은기라. 그 곡을 퇴폐로 본다고 하더라고. 빈대가 왜 있고, 젊은애가 할 일도 없이 아침에 일어나서 소주를 먹고... 우리나라가 지금 가난에서 벗어나서 잘 살려고 하는데 무슨 얘기냐. 새마을 운동이 한창인데 라고 말한다는 거지.

Q: “하루 아침”에서 목탁 소리가 들리는데요, 이것도 특별한 의도가 있는 건가요? 한대수 님 음악은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의도가 있는 것처럼 들리네요.(웃음)
- 목탁 소리는 임용환이가 했지. 특별한 의도 같은 것은 없고, 박자 맞추기가 좋더라고. 하하. 그 소리가 들어보니까 재미있던가? 그러니까 우리가 실험적으로 해 본 것이 제대로 맞아 들어간 것도 많은기라.

Q: 자꾸 기억력을 요하는 질문만 드려서 죄송한데요, 1집 가운데 한국에서 지은 곡은 어떤 건가요?
- 와, 그것도 기억해 내라고? 어디 보자, “물 좀 주소”는 여기서, “하룻밤”도 여기서. “바람과 나”는 거기서. “잘 가세”는 여기서 했고... “옥의 슬픔” 거기서, “행복의 나라”도 거기서, “인상”은 아까 말했고. “사랑인지”는 여기서.

Q: “사랑인지”는 드물게 사랑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노래 같습니다. 구체적인 사연이 있는 건지요?
- 하하, 얘기해 줄까요. 내가 TBC에 고정출연할 때 방송을 하고 있는데 스튜디오 밖에 아리따운 아가씨가 있더라고. 탤런트로 활동하던 여자였어. 그 여자가 “한대수 씨 방송 끝나고 저녁이나 같이 할까요”라고 그러는 거야. 황홀했지. ‘이런 사람이 내 음악을 이해하다니...’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그 여자와 사랑에 흠뻑 빠져버린 것이지. 그 당시 서울에 아파트가 별로 없었고 마포에 몇 개 있었는데 이 여자가 거기 살았어. 그래서 아파트에 자주 놀러 가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고 새벽에 그 집을 나서는데, 바람은 내 머리를 휘날리지 가로등 불이 켜져 있고 새벽은 천천히 밝아 오고... 그러니까 바로 가사와 곡이 나오더라고.(주: 2절 가사는 “가로등 쳐다보면 새벽은 밝고 바람은 내 머리를 가볍게 휘날리며 이것이 사랑인지”이다.)

Q: 오늘 인터뷰의 대박입니다(웃음). 이제 1집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먼저 신세계 윤상호 사장도 이 음반이 잘 팔릴 것으로 예상하고 제작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 그 사람 완전히 비즈니스맨인기라. 음악에 대한 사랑도 있긴 있지만 아무래도 장사를 할 줄 아니까 시작했겠지. 한마디로 사업가지. 사업적인 계산이 안 되뿔면 아예 시작도 안 했겠지. 하하. 3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팔리는 음반이 됐으니까. 아무튼 끝내주는 비즈니스 맨이지.

Q: 1집은 당시 평에 따르면 ‘불온’하다고 평가되는 음반이었는데, 무사히(!) 취입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가능했는지요?
- 그런 여건이 된 것은 내 군대간 사이에 김민기가 1집에 “바람과 나”를 넣었지 않은가. 또 양희은이가 “행복의 나라” 불렀고. 마침 그 노래들을 대학생들이 좋아하고 있었고, 젊은이들한테 많이 퍼져 있었지. 그래서 김진성 씨가 내를 신세계로 끌고 갔는데, 알고 보니 그 두 곡이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걸 알고 취입한다고 하는기라.


“우리 젊은이들 자신이 여치같이 보이더라고. 밟으면 다 죽잖나”:
[고무신](1975)에 대한 이야기


Q: 그럼 이제 2집 [고무신](1975)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여기에는 이정선 님도 참여하셨는데, 당시 이미 상당한 기타 고수로 알려져 있었는데 참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요.
- 이정선 씨는 음반에서 어쿠스틱 기타를 담당했지. 누가 베이스 치는 친구라고 이정선 씨를 데리고 왔어. 그 때 학생이었는데, 이정선 씨가 음반 녹음하기 전에 연습 많이 해 가지고 참여한 거지.

Q: [고무신]에서 연주를 맡은 ‘무지개 사운드’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시죠. “오면 오고”에서 5도씩 왔다 갔다 하는 베이스도 무지개 사운드의 작품으로 보이는데요. 또 그 밴드가 참여한 다른 음반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 ‘무지개 사운드’는 그 때 젊은 록 밴드였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엄진 씨가 데려온 친구들이야. 사람들 이름은 기억나질 않네. 대학교 밴드였는지 어땠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만.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올갠. 그렇게 약간 ‘로킹’한 연주는 이정선 씨가 아니라 무지개 사운드가 했지. 그 친구들이 다른 데 참여했는지는 내도 모르겠어. 앨범이 유실되고 회사도 문 닫고 했으니까 알 수가 없지. 이거 인터넷에 올려서 ‘그 때 무지개 사운드 하시던 분들 좀 나타나시오’라고 글 좀 써 봐요. 그 사람들이 살아 있다면 내 나이쯤 됐겠네. 어디 봅시다. 근데 음반에 곡목만 있고 멤버 얼굴은 없네. 얼굴 안보면 기억을 몬한다 아이가.

Q: 아무튼 한대수 님도 음반 제작하실 때, 세션 선택에 나름대로 상당히 고려를 했던 건가요? 무지개 사운드도 한대수 님 보기에 연주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인지.
- 그럼. 그 당시 록 음악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고. 그 정도면 훌륭했지. 내 생각입니다만, 앨범마다 세션이 좋았잖나. 색깔도 서로 다 달랐고. 그 때 그 사람들이 다 출발은 내하고 같이 했지만 지금은 대가들이 됐잖아. 콩가랑 탬버린 친 유복성 씨도 어릴 때 같이 한 것이고, 내는 또 운이 좋게도 그 당시 같이 한 사람들이 다 아마추어였는데, 나중에 보면 거진 다 대가가 되어 있는기라. 손무현이도 21살 때, 김민기도 20대 초반에, 이정선이 그 아도 학생 때 같이 했으니까. 무지개 사운드도 그렇고. (질문자: 한대수 님이 보는 안목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래서 영광스러워.

Q: 한대수 님 보시기에, 기타 세션으로서 임용환 님과 이정선 님을 비교한다면 어떻게 평가하시겠어요? 잘 친다 못 친다의 차원을 떠나서, 두 분 다 제각기 장단이 있을 것 같은데요.
- 둘 다 ‘양호’했어. 둘 다 양호한데, 가들이 둘 다 착해. 임용환 씨도 조용하게 기타 잘 치고, 이정선 씨도 그렇고. 둘 다 내성적이야. 특히 임용환 씨가 굉장히 내성적이고 자기 표현 잘 안하고, 이정선 씨도 그렇고. 그리고 둘 다 워낙 처음 녹음하는 거니까 얼떨떨했겠지. 정신 없었을기라.

Q: 이정선 님도 임용환 님의 경우처럼 한대수 님이 음을 불어주면 따라 치셨나요? 또 당시 녹음할 때 기타 모델이 어떤 기종이었는지 기억나시면 말씀해 주시죠.
- 이정선이도 우리 집에 와서 연습을 좀 하고, 부르는 대로 따라서 쳤지. 임용환 씨가 친 기타는 방의경 씨한테 빌렸어. 방의경 씨 기타가 제일 좋았거든. 그리고 나는 고야 기타라고, 별로 좋은 기종은 아닌데 그걸로 쳤지. 이정선이는 야마하 기타였던 것 같은데, 그것도 방의경 씨 것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네. 아마 이정선 씨가 그 때 기타가 없었을기라. 정성조 씨 밴드나 무지개 사운드의 기타는 본인들한테 물어보면 알 것이고.

Q: 오르간의 경우 1, 2집에서 사용한 것은 해먼드 오르간으로 보이는데요, 로큰롤에 많이 쓰이는 해먼드 오르간을 활용한 것은 음악 컨셉을 고려한 건가요? 저희가 보기에는 잘 조화되지 않는다는 느낌도 받는데요.
- 나야 그게 해먼드인지 다이아몬드인지 그 때는 몰랐지.(좌중 웃음) 그냥 그게 있으니까 쓴 거지 뭐. 마침 스튜디오에 있었거든. 아무튼 올갠이 비행기 뜨듯이 ‘웅~’하는 효과를 냈지. 올갠이야 1집에서는 정성조 씨가 워낙 잘 쳐서 내 입장에선 별 불만은 없었는데, 왜?

Q: 저희의 편견인지는 모르지만, 한대수 님의 경우 옛날 녹음이 요즘 깔끔한 것보다 더 듣기가 좋은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선 요즘 것과 예전 것이 비교가 안 되겠지만요.
- 그렇지. 그 당시의 녹음 같은 것은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돼. 지금이야 까지고 터진 것도 다시 해서 집어넣고 하잖아? 그 때는 한꺼번에 확 가는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실수 한 두개 정도는 오케이야. 나도 1집에서 틀린 게 몇 개 있다고. 2집도 그래. 이정선 씨가 노트(note)를 잘 못 쳤던기라. 그 왜 “나를 보게나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 다음에 기타가 틀렸지.(주: “자유의 길”을 말한다.)

Q: 2집 [고무신]에서는 프로듀서를 엄진 님이 맡으셨는데, 어느 정도나 음악적인 관여가 있었던 건가요? 대부분의 한대수 님 음반은 셀프 프로듀싱에 가까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 엄진 씨가 관여 많이 했지. “물 좀 주소” 나오고 나서, 자기도 반응이 온다고 생각한 거지. 그 때 내는 ‘코리아 헤럴드’ 기자 생활 할 때라. 그런데 엄진 씨가 듣기에는 내 노래가 부드러운 면도 있으니까 ‘이쁘게 나가자, 현악기를 많이 쓰자’고 이야기한 것이지. 그게 별로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일단 엄진 씨가 하자고 한 것이고, 내 입장에서야 무조건 만들자고 하는데 고마운 거지. 이제 두 번째 앨범인데.

Q: 저희가 듣기에도 그 현악 편곡은 좀 별로거든요.(웃음) 저희가 질문을 드린 요지는, 어떤 사람들은 1집이 상업적으로 실패해서 2집 때는 대중성을 노리고 그 당시에 관행이던 스트링 편곡을 한 게 아닌가하는 이야기도 하거든요? 엄진 님이 ‘가요’계에 잔뼈가 굵은 분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지 않았나 해서 드린 질문입니다.
- 엄진 씨야 히트곡도 몇 곡 있었고, 윤복희, 윤항기하고도 사이좋았지. 윤복희, 윤항기가 요즘으로 치면 이효리나 강타 아이가. 그러니까 엄진 씨처럼 상당한 관록이 있는 사람이 내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상당히 희한한 거야. 말하자면 대중적인 히트 메이커인 사람인데 내 음악을 좋아하더라고. 그런 사람이 프로듀싱을 나서니까 나는 어느 정도 프로듀서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지. 어떻게 말하면 약간 대중적인 판단을 한 것일 수도 있지. 그런데 아셔야 할 것이, 모든 음악가는 인디나 오버나 언더나 모든 음악가의 갈망은 많은 사람들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거 아닐까. 이건 틀림없는 사실인기라. 이기 팝(Iggy Pop)도 그럴 거고, 스캇 매킨지(Scott Mckenzie)도 그럴 거고, 이효리도 그렇고, 내도 그럴 끼고. 수백 만 명이 들으면 좋겠다는 것은 근본적인 작곡가의 자세인기라. 그렇지 않은가?

Q: 그렇군요. 그런데 2집은 컨셉 앨범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 거죠. 곡의 배열이나, 가사의 점층적 구조나, 절망적인 “여치의 죽음”부터 “희망가”로 이어지는 점 등등이 말입니다.
- 그렇지. 내 딴에 컨셉을 생각하지. 모든 앨범에서 어느 정도 컨셉을 생각하지.

Q: “여치의 죽음”은 속된 말로 ‘약 냄새가 나는’ 싸이키델릭한 느낌이 있는 곡인데요. 스케일의 독특함이나 연주 방식이 라비 샹카(Ravi Shankar) 같은 인도의 라가 음악을 연상시키거든요. 타블라를 치신 건가요? 아니면 콩가나 봉고로 하셨는지요.
- 타블라는 칠 줄 모르지. 봉고로 했지. 잘 보셨구만. 내가 라비 샹카를 1967년에 처음 들었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은기라.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Pop Festival) 같은데서 라비 샹카가 좀 죽여줬나? 그런 분위기에 젖었고, 인도 음악을 이해하려고 하고 좋아한기라. 인도 음악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인정하지. 그리고 이것을 기타로 하면 어떤 분위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고민을 많이 해본기라. 만약에 외국 사람이 우리 가야금을 듣고 ‘야 저거 소리 좋다’고 해서 기타로 가야금 연주하는 거나 마찬가지라. 나는 기타로 인도의 라가 분위기로 한번 가 보자. 그래 타블라를 썼으면 좋다켔는데, 타블라 하는 사람이 없었지. 그래서 유복성 씨 보고 ‘봉고로 이런 기분 내 보시오’해서 맞춰 본 것이지.

Q: 그럼 “여치의 죽음”에서 기타는 직접 치신 건가요? 독특한 음색이 조율법에서 나온 것 같은데요. 녹음도 이상하게 한 것 같구요.
- 그게 조율법이 좀 특이하지. 절대 가르쳐줄 수 없어. 하하하. 녹음도 왼쪽 오른쪽으로 왔다갔다 했지? 그게 인자 엔지니어가 잡은 소리지. 가만히 있어도 빙빙 돌끼라. 왼쪽-오른쪽-왼쪽-오른쪽. 엔지니어가 그런 식으로 잡은기라. 내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 그 당시 말로 하면 서라운드 사운드지. 그 옛날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손으로 그리면서) 이렇게 돈다고.

Q(김형찬): 조율 같은 부분은 한대수 님이 인도 라가 음악을 연구한 성과란 말씀이군요. 실은 안 가르쳐주셔도 대충 압니다. 개방현을 많이 쓰면서 나머지 중간 현에 반 음 차이 나는 조율을 한 것 아닌가요? 또 라비 샹카 말고, 샌프란시스코 사운드에도 영향 받으신 부분이 있나요?
- 하하, 김형찬 선생은 나중에 혼자 오시오! 인연 해봅시다. “여치의 죽음”이 선생한테는 물건으로 느껴졌구만. 아무튼 내가 연구를 많이 한기라.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은,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있더라고. 내가 연구한 건 그 한 곡에만 써먹었지. 두 번 하면 재미없지 않나. 샌프란시스코 사운드의 영향은 많이는 안 받았고. 나는 그레이트풀 데드(The Grateful Dead)는 싫어 해, 곡도 좋지 않고 미국애들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하는지 모르겠어.

Q(김형찬): 개인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1974-75년 당시 박정희에 저항하는 가요는 “물 좀 주소”, “미인”, 그리고 “여치의 죽음” 정도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 그렇게 생각해 주면 영광이지. 왜냐하면, “여치의 죽음”은 가사가 없으니까 음으로 반항한 거 아이가.

Q: 그 자체가 반항이죠. “여치의 죽음”은 아무래도 일종의 메타포일텐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저희 생각으로는 박정희는 개미를 원했는데, 한대수 님은 여치를 이야기했다고 보여지네요. 다시 말해 사회에서 예술가의 존재가 필요한데 일개미의 사회에는 예술가는 필요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거든요.
- 야, 그럼 해석이 되네. 여치가 잉글리쉬로는 그래스하퍼(grasshopper)인데, 풀에서 주로 살잖나. 우리 젊은이들 자신이 여치같이 보이더라고. 밟으면 다 죽잖나. 풀을 집으로 살고. 그게 죽으면 그냥 한 사람의 죽음이지만, 음으로 크게 만들어 버린 거지. 만약에 여치가 아니고 무슨 장군의 죽음 그랬으면 웅장하게 나올 것 아이가. 비록 쪼만한 여치지만 그것을 웅장하게 만든 것이지.

Q: “여치의 죽음”은 원래 15분짜리 대곡으로 알고 있는데요. 러닝타임이 줄어든 이유가 있나요?
- 엄진 씨가 중간에 끼어들어 갖고 짧게 만든 것이지. 그게 아마 나중에는 5-6분밖에 안될걸. 사실 10분 넘어가야 제 맛인기라. 길어야 맛이 나는데 자꾸 안 된다고 사인을 주잖아. 끊으라고.

Q: 톱 연주는 어떻게 한 건가요? 그 당시에 톱 연주자가 한 분 있었는데, TV에 자주 나왔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혹시 그 분을 데리고 녹음한 것인지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 그건 모르겠네. 톱은 내 혼자 배워서 한기라. 내가 톱을 어떻게 배웠는가 하면, 배우면 또 재미있지. 연희동에 사는데 세탁소 아저씨가 내가 음악하는 걸 알고, 자기도 젊은 사람인데 심심하잖나. 그래서 나를 자주 만나러 왔지. 옆집 사니깐. 그런데 하루는 이 친구가 톱을 가지고 소리를 내는기라, '야, 이게 뭐냐'고 생각해서 세탁소 아저씨한테 배운 거라고.

Q: 한대수 님 음반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보면 재미있는 요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오후”를 들으면 뿅뿅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그것은 어떻게 한 건가요? 몇몇 팝 음반에서는 가끔씩 들어본 것도 같은데요.
-그건 주스 하프(Juice Harp)라고 하는기라. 옹아옹아하는 것인데, 미국의 컨트리 뮤직에서 많이 쓰지. 아니, 마우스 하프(Mouth Harp)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Q: 저희의 관점에서는 “고무신”이 한대수 님 곡 중에서 가장 토속적인 느낌을 주는 곡인 것 같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편견에 따르면 ‘한대수는 양키 문화의 첨병’이라는 시각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시선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나요?
- 그게 시골을 그리워하는 부분도 있었고, 내가 그런 점에 대해 항상 답답해했으니까. 내가 내 자신을 촌에 있다고 비유를 해 본 거야. 촌놈이라고 생각해보고, 촌놈이 있으면 촌색시도 있어야하고, 또 내가 가난한 집안의 어부의 아들로 생각을 해 본거지, 내 자신을. 그래서 아버지 오면 뭐든지 해결이 된다.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그런데 사실 그 때는 상당히 기분이 안 좋을 때였거든. 너무 답답하고 돈도 없고 어머니 집에서 쫓겨 나왔고 그런 상태거든. 그래서 그런 상태를 비극에서 희극으로 만든 것이지.

Q: 그러면 2집 또한 하루 만에 다 녹음한 건가요? 만일 하루 만에 끝내는 식이 아니었으면 트랙도 2트랙보다는 더 쓰셨을 것 같은데요. 더빙도 하셨을 테구요.
- [고무신] 녹음은 하루 만에 끝낸 건 아니에요. 2-3일 걸린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냐면 내가 직장생활 할 때인기라. 그러니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불가능하고, 일단 그 날 취재 끝내고 두 시에 마감하고 그 뒤에 녹음하는 식이었지. 그렇게 보면 이삼일이라 하는 게 맞겠네. 2집은 트랙도 4트랙이었고, 더빙은 아까 말한 톱 연주와 이정선 씨의 기타 빼고는 안 했지. 거진 라이브인기라.

Q: 가사에 대해서도 여쭤볼까요? 가사를 보면 라임을 맞추려고 한 흔적이 보입니다. “고무신”의 가사도 그렇구요. 음반에는 뒤에 실리지만, 이미 그 전에 만들어놓으신 “마지막 꿈”의 경우도 “시인, 여인, 미인...” 인가요? “마지막 꿈” 3집 [무한대] 수록)
- “시인, 여인, 미인, 노인, 맹인, 장인, 고인, 행인” 일종의 라임이었지. “생존경쟁 나의 투쟁 인공위성 만리장성 금은보석 썩은 비석”도 라임이 있잖아. 어떤 기자가 그러는데 한대수의 곡이 ‘최초의 랩’이라고 그러대, 하하.

Q: 음반이 “희망가”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음반의 컨셉은 희망에서 절망으로 가는 과정인데, 마무리는 “희망가”네요. 이러한 구성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 “희망가”는 일제시대의 노래 아닌가. 일제시대의 절망을 노래한 것이지. 근데 내 기분에는 그때도 일제시대와 똑같은 억압이 있더라고. 그래서 ‘또다시 희망을 불러야 된다’는 그런 뜻이었지. 이해되는가?


“존 레논은 논리가 당최 서지 않는 이 사회를 논리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이라고”:
한대수가 영향 받은 뮤지션들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존 레논 추도식. 3분간 침묵이 있었다.

Q: 이제 디테일한 질문은 일단 접기로 하겠습니다. 한대수 님은 자신의 음악 장르가 포크라고 생각하시나요, 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다른 정의가 있는지요.
- 나는 사회의 흐름이나 나 개인의 변화에 따라서 필요한 음악을 그때그때 만들지. 그때 내가 주로 통기타로 주로 연주하니까 그게 포크 음악으로 여겨진 것이겠지. 통기타로 주로 하면서 음악적으로 너무 심심하면 하모니카를 불면서 약간 음의 변화를 주기도 하고, 보강시키기도 하고... 아무튼 당시 우리나라에 기타 치는 사람이 없었어. 심지어 나를 기타리스트라 불렀을 정도니까. 하하.

Q: 외국에 체류하는 동안 당대의 모던 포크도 많이 접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포크 이외의 다른 장르의 음악은 어떤 것을 좋아했는지요?
- 그렇지. 포크도 많이 듣고,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도 좋아했고. 짐 모리슨(Jim Morrison)도 즐겨 들었지. 그런 음악도 하고 싶었는데, 한국 오니까 같이 할 사람이 없는기라. 아까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텐데, 그래서 통기타 하나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거지. 하지만 포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다 좋아하지. 하드 록도 좋고, 헤비메탈도 좋고.

Q: 이건 자서전을 읽고 궁금했던 점인데요, 책에 보니까 '밥 딜런(Bob Dylan)은 별로고, 존 레넌(John Lennon)이 훌륭하다'는 논조로 쓰신 부분이 있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 물론 음악적으로 밥 딜런의 영향을 안 받은 사람이 없지. 그 당시에 제일 큰 영향력이라면 비틀스(The Beatles)와 밥 딜런인기라. 그렇제? 그런데 내가 하모니카 불고 통기타 침으로서 밥 딜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졌는데, 어느 나라나 통기타 치고 하모니카 부는 사람은 있는 것 아닌가? 일본에도 있었고, 영국에도 도노반(Donovan)이라고 있잖은가. 그런데 밥 딜런은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질 않는기라. 그 사람이 대가라는 것은 인정하는데, 그러면 차라리 나는 닐 영(Neil Young)을 더 존경하지. 내가 존 레논을 존경하는 것은 그 사람이 비틀스로 활동하면서 그렇게 큰 명성과 '화폐'를 벌었잖아? 그랬는데도 그 사람은 항시 평민들의 고통을 생각했고, 자기 자신이 편안한 상태에서도 그냥 안일하게 있지 않았다는 점이지. 항시 자기 위치를 하나의 도구로 삼아 논리가 당최 서지 않는 이 사회를 논리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이라고.

Q: 말씀을 듣고 보니 밥 딜런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은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밥 딜런을 싫어하시는 것은 너무 ‘화폐’를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될까요?
- 물론 밥 딜런 영향은 받았지. 안 받은 사람이 있겠나. 나뿐만 아니라 전부 다 받았지. 나중에 보니까 비틀스도 밥 딜런 영향 받았다고 하더만. 특히 가사 쓰는 일에 있어서. 훌륭한 작곡가이고 작사가인 것은 맞아. 그런데 내가 안 좋아한다는 것은, 15년 전쯤에 미국에서 어느 공연을 보러 간 이후였던 것 같은데, 그 양반은 내가 보기에 자기 유태계 사람들끼리 비밀스러운 무엇이 있는 것 같은기라. 처음에 그 사람 이미지는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고생하고, 기타 하나 들고 배를 굶어가며 노래하는 시인의 느낌이었는데, 나중에 공연을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그다지 성의도 없는 것 같고, 노래를 아무렇게나 해버려. 그리고 ‘굿바이’하고 가고, 전혀 땀도 안 흘리고. 그래서 내가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존경심은 별로 안 생기던기라. 차라리 존 레논이나 닐 영이 훌륭하고, 조니 미첼(Joni Mitchell)도 좋고.

Q(김형찬): 한대수 님 보시기에는 한국에서 그 당시 외국 음악을 들었던 포크 가수들이나 포크 마니아들이 밥 딜런 같은 프로테스트 포크와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 Mary), 브라더스 포(Brothers Four) 같은 부드러운 상업적 포크 중에서 어느 쪽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세요? 이 질문을 드리는 것은, 그 당시 음악 청중 정서를 고려할 때 밥 딜런 류의 음악은 거칠고 굉장히 미국적인 사운드라서 정말 특별한 매니아 말고는 좋아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 내 보기에는 양쪽 다지. 왜냐하면 부드러운 사운드가 우리가 서양 음악을 접하는 첫 계기인 것이 사실이거든. 그전에도 프랑크 시내트라(Frank Sinatra)니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들은 사람이 있긴 있었지만 사실상 제대로 음악을 이해하게 된 것은 트윈 폴리오라든지 나라든지, 서유석이니 김민기 등부터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부드러운 사운드에도 또 아름다움이 있는기라. 에벌리 브라더스(The Everly Brothers),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 Mary) 같은 사람들. 또 반대로 밥 딜런 같은 류는 하나의 사회를 일깨워주는 쪽이고, 그런 부류가 있었지. 둘 다 중요했지. 물론 그 당시 양반들이 가사까지 다 들여다보고 음악을 선택하는 경지까지는 아니었지. 그래도 가사를 해석하지는 않더라도 거친 사운드면 "아 이거 뭔가 뜻이 있겠구나"하고 알아먹었을 것이고, 부드러운 사운드도 하모니에 또 매력이 있잖아. 그런데 김형찬 씨 말도 맞아. 부드러운 건 접하기 쉬우니까 프로테스트보다는 대중적인 인기는 있었을기라. 그래도 그 유신 체제하에서도 뜻있는 음악들은 사람이 많았지. 명동에 예스란 클럽이 있었다고. 거기가면 프로그레시브 록 같은 음악, 예스(Yes), 무디 블루스(The Moody Blues), 킹 크림슨(King Crimson),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같은 음악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많았어.

Q: 예스는 어떤 컨셉으로 운영되던 곳이었는지요?
- 그냥 술파는 곳이었는데, 음악은 미국에서 듣는 음악 그 수준이지. 선곡은 사장이 했는데 이름은 까먹었네. 아무튼 거기는 위치가 명동의 달라 골목이라서 외국 사람들도 많이 왔었지. 또 이사벨이라고 함영진 씨라는 연극배우가 하는 업소도 있었고, 명동이 그 당시 상당히 진취적이었지. 단지 미국 문화를 동경하는 것을 넘어서서 미국 문화 중에서도 ‘프로테스트’하고 ‘프로그레시브’한 것을 흡수하고 자각한 분들이라고 볼 수 있는기라.

Q: 조금 전에 록 음악은 국내에 연주할 사람이 없어서 통기타를 했다고 하셨는데요, 미8군 무대에서 연주하던 그룹 사운드 분들을 만나본 바에 의하면 1960년대 말에 바닐라 퍼지(Vanila Fudge)나 아이언 버터플라이(Iron Butterfly)를 이미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한대수 님은 그 쪽 연주자들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으셨던 건가요?
- 맞아, 미8군 무대와 나는 관계가 별로 없었지. 미8군 클럽에 가면 그런 음악도 듣고 하고 했을텐데, 나랑은 좀 거리가 멀었지. 만약 그런 사람들과 사귀었다면 음악이 많이 달라졌겠지.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임용환 대신 김홍탁 씨와 친했다면 사운드가 많이 달라졌겠지. 완전 포크 록이 되었겠지.

Q: 키 보이스도 1960년대 중반에 “Blowing in the Wind”를 녹음했고, 비록 가사는 원곡과 다르게 번안되었지만 음악 형식상은 분명 포크를 연주하고 있었거든요. “Green Back Dollar”(킹스턴 트리오)도 무대에서 종종 연주했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과 만날 기회는 없었는지요?
- 전혀 우린 관계가 없었으니까. 씬이 완전히 달랐지. 그런데 내가 주로 음악을 찾아다니고 하는 사람은 아닌기라. 예를 들어 [천사들의 담화](1992) 때 재즈 분위기를 낸 것도 이우창 씨와 잭 리가 주위에 있었으니까 한 것이지. 내가 사람들 찾아다니는 타입은 아니니깐 주위에 같이 있을 경우 같이 음악을 하게 되는 거지.

Q: 정리하자면, 한대수 님은 한국에 와서 굳이 포크를 하려 했던 게 아니라 환경 상 통기타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도 되겠군요. 아무튼 한대수 님 음악을 포크로 정의하는데는 별 이의는 없으신 거죠? 한대수 님이 귀국한 시점이면 미국 등에서는 순수 포크가 포크 록으로 변화된 다음 시기인데 이런 동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요.
- 그렇지. 통기타 하나 갖고 하모니카 불었으니 포크라고 불러야지. 내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통기타 뿐 아이가, 안 그런가? 하지만 당시를 뭐 그렇게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는 기라. 포크는 포크 나름대로 있었고, 또 포크에 다른 게 가미되기도 하고, 재즈도 프로그레시브도 있고...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터진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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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와의 인터뷰(2)로 계속

날짜: 2002년 10월 3일
장소: 서울 연희동 한대수의 거처
질문 및 참석: 신현준, 최지선. 김형찬, 송창훈
정리: 송창훈, 신현준, 배성록, 이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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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출처 http://www.weiv.co.kr/
한대수 공식 사이트 http://hahndaesoo.co.kr 

2009/12/01 14:40 2009/12/01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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