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리

from 영도 影島 2010/04/14 17:55
어릴 적에 들었던 영도의 옛 지명들을
떠올리고 찾아본다.

우선은 '서바리'라고 하는 지명이다.
어릴적 아버지와 놀러갔던 바닷가의 이름인데,
바다가 아닌 다른 곳에 그 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한자로 '西跋'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어장(漁場)의 이름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영도는 예로부터 고기잡이가 성행했던 곳이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서발, 서바리, 윗서발, 아랫서발
이런 단어들을 떠올리다 보면,
한자로 표기되기 훨씬 전부터 있던 이름 같다.
낙동강 변에도 '서발'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강의 흐름이 바뀌어 새롭게 생긴 뻘,
즉 '새 뻘'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영도는 7000년 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니
까마득한 시절의 말과 닿아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벌판'이라는 뜻의 '서라벌'이 
나중에 '셔블'이 되었다가
'서울'이 된 것처럼.

그리고 '선덤'이라는 곳이 있다.
'선더멀'이라는 표기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그 앞이 매립되어 지금은 땅 속에 들어왔지만,
원래는 바다쪽으로 돌출한 곳이었다.
그 아래의 남쪽으로는 모래사장이 있었는데,
중학교 때, 그 모래 속에서 유연탄 조각을 줍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개항 전후에 부산항에 드나들던
증기선 연료 중의 일부였는지도 모른다.

선덤 언저리에는 6.25 당시
보도연맹 사건과 관련되어 총살된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묻어버린 곳이 있다.
그 근처에 수필가 김소운씨의 기념비도 있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조내기, 일산배기 한짓골 등등이 있다.


*



이 사진은 아마도 1960년 대 초 쯤일까?
어쩌면 더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의 사진일 것 같다.

영도의 청학동이다.
오른 편에 보이는 것이 청학성당이다.
지금은 집들에 갇혀서 볼 수 없는 앵글의 사진이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불쑥 솟아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집들을 보면,
간간이 기와를 얹은 모습이 보이지만,
대체로는 밋밋한 지붕들이다.

어릴 때 내가 그린 집들은
대체로 모범답안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직선으로 죽죽 그어서 그렸다.
한옥의 곡선처럼 우아한 곡선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학교에서 강조하다 보니,
나는 그림을 잘 못 그리는 아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사진을 보면 그때의 나는
정직하게 본 것을 그렸던 것이다.

내가 태어난 영도는
임진왜란 이후로는 거의 빈 섬이었고
부산이 강제로 개항을 당하고 조선이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縣)의 어부들이 옮겨왔고,
그들을 따라서 일본 목수들이 들어와 일본식 집을 많이 지었다.
그래서 그 후에 지은 집들도
일본식 집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내가 태어난 청학동의 집도
기와는 한국식으로 얹었지만,
일본식 미닫이 문과 이불장이 있었다.
그리고 쪽마루와 격자창으로 된 문도 있었다.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의 영화를 보았을 때,
그리고 치바(千葉)에 갔을 때 느꼈던
이상한 친근감과 당혹감은
그런 데서 연유했던 것 같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친숙하면서도 생소한.

그리고 피난민들의 급하게 지었던 판자집들이 많아
직선이 더 익숙했을 것이다.


                                                          이중섭- 범일동 풍경

사진 오른 편의 청학성당은 유서가 깊은 곳이다.
병인년 천주교 박해를 피해 영도로 숨어든 사람이
몇몇 신자들과 함께 공소(公所-사제 없이 미사드리는 곳)를 만든 곳이다.
그 후로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인적인 드문 빽빽한 숲 속의 공소.
숨어들기에 적합한 곳이었을 것이다.

일본식 선을 가진 나즈막한 집들 위로
둔중한 성당이 비죽 솟아 있는 생경스런 사진을 보니,
성당을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진
옛 유럽의 시골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참으로 기괴한 조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저 바다,
구름에 수평선은 가려져 있고
그 어디쯤 오륙도가 숨어 있을 것이다.
저 배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진은 아마도
아버지가 찍었을 것이다.

*

이런 이야기들을 주절거리고 있으니
고향에 얽힌 대단한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몇 개의 사실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그 외의 사실들을 더 많이 알게 된다.

내가 태어난 청학동(靑鶴洞)의 일제시대 이름은
청산정(靑山町)이었다고 한다.
영도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제1)영도교회는
산수교회(山手敎會)교회라는 이름으로 바뀌기도 했다.

개항기 부산으로 건너온 일본인
하사마 호오타로오(迫間房太郞)라는 자는
고리대금업을 통한 수탈의 방식으로
영도의 땅 135만평을 손에 넣었는데,
영도다리가 개통되자 땅값이 3배 정도 뛰었다.
그리고 일본군부에 그땅의 일부를 넘겨
일본군의 중요한 거점이 되도록 했다.
아마도 그 땅 안에 영도 제1위안소가 있었을 것이다.
고리대금, 정경유착, 토건재벌...
그 사례는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사채라고 하는 고리대금업은
채권회수 방식이 잔인하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때는 더 지독했다.
고리채로 엄청나게 늘어낮 빚을 못갚는 경우
대금업자가 채무자를 임의로 감금했다고 한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집문서, 땅문서를 넘기고
채무자를 데려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정보들을 보는 것은
어쨌거나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좀 자제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일 가운데 비어버리는 어중간한 시간에
이런 것을 계속 찾아보게 된다.





2010/04/14 17:55 2010/04/1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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