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from 이야기 2010/05/03 14:29



흔히들 추억,추억 하는데 과연 '추억'이란 무엇일까?
그렇다면 또 '기억'이란 무엇일까?

나의 편의적인 분류이긴하지만,
'기억'이란 여전히 현재와 긴장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과거의 어떤 일을 떠올리는 것이고,
'추억'이란 편안하게 정돈되어 현재와 마찰 없이
어떤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스스로 내겐 추억이 없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7080 콘서트처럼 왕년의 가수들이 나와 옛날의 노래를 부르고,
그것을 들으며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며
아,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어, 지나고 보니 모두 좋은 거였어...
이런 식의 감정들을 갖게 되는 그런 편안함이 내게는 거의 없다.
그리고 이전에 열풍을 일으켰던 모교사랑 싸이트에도 큰 관심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를 그저 달콤하게 향유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한
이기적인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의 과거란 추억 마케팅이 그리는 과거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하지 않은가.

추억이란 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억으로부터 도피하는 어떤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고 그래서 그 속에서
스스로를 조금 편안하게 놓아주는 것도 미덕이지만,
그렇게 편하게 생겨먹지 못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

잘못 살아왔구나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많은 것에서 멀어졌을 때 
내 마음의 바닥에서 겨우 붙어있던 기억들이
선명하게 살아오기 시작했다.
영도 비탈길의 기억들,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들.
버려두고 도망쳤던 그 많은 것들이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의 과정을 통하여
지금까지 내가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그것은 과연 옳았는지,
그러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기억이 나의 현재에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죽어버린 어린 시절의 짝을 기억했고,
항구를 휘돌아온 겨울 바람이 창을 흔들며 하던 말을 떠올렸고,
내가 아는 유일한 그림의 천재가 작업복을 입고
가난한 거리의 모퉁이를 돌아가는 것을 기억했고,
수십 년 간 잊고 있던 아버지의 한 마디를 기억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에 상응할만한 삶의 태도를
내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세상의 높은 이름을 위한 삶보다는
주변의 작은 것들을 노래하는 삶
수많은 가짜 이미지들이 던져주는 삶에 휘둘리기 보다는
작고 연약한 것을 바라보고 그것에 말을 거는 태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라고
생생하게 살아난 나의 기억들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돌이킴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지난 10년을
나는 과연 어떻게 보냈던 것일까.
스스로 부끄럽고 모자란다.
떠나고 싶었던 것들에서는 떠나지 못했고
이루고 싶었던 것들에도 닿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 수 년 간은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

성경에는 '기억하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전지전능한 신이 너와 함께 있음을 기억하라는 식의 이야기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너희가 나그네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
'네가 종살이했던 것을 기억'하라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 곁에 있는 나그네와 약한자들을
보듬고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야기이다.

추억이란 가진 자가 기억을 소유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위험하지도 않다.
고통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그릇된 자신의 삶을, 또 다른 이와의 관계를,
그리고 궁극적으로 미래를 바꾸지 못한다.
그저 달콤하게 소비되는 것이다.
반면 기억은 괴로운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소리에 더 귀기울이면
자신의 삶을 돌이켜야 함을 깨닫게 된다.
고단한 삶, 가난한 삶으로의 초대이다.
좁은 길을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를 바꾼다.

과거를 제대로 만나지 않는다면 현재란 허공에 떠있는 것이고
미래란 시간이 흘러 다가올 언제 쯤에 불과하다.

*

스스로 기억의 소리를 새기기 시작한지 오래되었지만,
내 걸음은 지지부진하다.
오래고 오랜 동굴 속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나왔으니
비틀거리더라도 조금씩 걸어갈 때이다.

날아보자, 날아보자 찢어진 나의 날개로.




 

2010/05/03 14:29 2010/05/0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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