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첫남편에게 맞고 사는 것이 너무 싫었던 그녀는
갓 낳은 아이를 두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다른 한 남자를 만나서 살게 되었다.
그 사이에서 딸이 생겼다.
그런데 그 남자는 매일 술을 마시고 일을 하지 않았다.
무기력한 남자였지만 때리지 않으니 견디며 살았다.
혼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십 수년을 살았다.

당뇨가 생겼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기 몸을 돌볼 겨를 없이 일을 하고 또 알바를 했다.
죽음이 온 몸을 갉아먹을 때까지 쉴 수 없었다.
교회를 다니게 되었지만,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것도 쉽지 않았고
웬지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 같아
걸음을 끊게 되었다.

얼마 전, 두고 온 딸 아이를 만났으나
자신을 버린 엄마를 원망하고 돌아갔고
연락이 닿지 않게 전화번호를 바꾸어버렸다고 한다.
딸을 버렸다는 자책도 컸겠지만
그 딸이 험하게 살아온 것을 알게 되어
그녀의 가슴은 더욱 아팠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길이란 길은 모두 어둠에 잠겼다.
지나온 시간이 모두 허사였고
살아갈 날들이 모두 아득했다.
중학교를 다니는 작은 딸을 생각하면서
그래도 마음을 잡으려 했지만
병은 그녀를 마지막까지 몰아갔다.

어느 날,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응급실에 가야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무기력한 남자는 엄두를 내지도 못내고
답답한 가슴이라도 풀라고
박카스를 사러 나갔다.
그 사이에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중학교 2학년 된 딸이
임종을 햇다.


                                                                피카소, 압생트를 마시는 여인 

피곤이 깊이 배인 얼굴이라고 했다.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얼굴이라고 했다.

그녀가 기도조차 할 힘이 없었을 때
누가 그 손을 잡아주었던가.
그녀가 죽음으로 달리고 있었을 때
누가 곁에 있었던가.

모든 게 번듯해 보이는 강남의 거리에서도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세상은 자살한 탤런트나 영화배우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게 만들지만,
어쩌면 오늘 건널목을 건널 때
내게 전단지를 건네던 사람,
혹은 서투른 손짓으로 나의 점심 식탁에
밥과 반찬을 늘어놓던 이들의 죽음은 무시한다.
작은 이들의 삶을 한 없이 멸시하는
이미지의 유통구조.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끊어 놓는다.
자본의 약탈이 극심화되는 세상에서
내가 열심을 내면 누군가가 필요한 무언가를 잃는다
내가 무언가를 가지면 누군가가 무언가를 가지지 못한다.
세상은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모르도록 만든다.
다양한 매체는 나의 삶과 이어져 있는 이들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된다.
바로 곁의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기부를 한다는 유명인에게 박수를 보내고
감상적인 적선에 감동하게 만들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음을 무시한다.

이런 세상에서 이런 죽음의 이야기를 들을 때,
독주를 마시고 영영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의 영혼이 평안 속에 쉴 수 있기를,
딸들의 삶이 결코 세상의 어둠에 묻히지 않기를
기도한다.
 






2010/07/28 16:18 2010/07/2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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