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from 나날 2010/08/23 13:32


얻어 온 구피 몇 마리가 살고 있는 어항에 낙서를 했다.
아이는 드림웍스 타이틀에서 나오는 것처럼
달 끝에 앉아 낚시를 하는 모습을 그렸다.

*

어릴 때, 집안의 벽지나 골목길의 벽들은 나의 낙서장이었다.
어머니가 바빠서 일일이 말리지 못했으므로
나는 거의 제재 없이 낙서를 즐겼다.
그러다 보니 국민학교 들어가서 그림도 재미있게 그렸다.
그런데 내 그림은 낙서의 선화(line drawing)에서 비롯된 것이라
교과 과정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만화에 가까웠다.

국민학교 5학년 쯤의 어느 날
영도 국민학교 강당에서 전시회가 있었는데
덴마크, 스웨덴 등 북구의 어린이들의 그림이
어쩌다 부산, 그것도 영도까지 들어와서 전시된 것이었다.
그 그림들이 나는 정말 좋았다.
내가 그리는 그림 투와 비슷한 그림들이 많았던 것이다.
분명한 선으로 활달하게 그려지고
뚜렷한 색채로 칠해진 그림들.

그때 아이들은 줄을 서서
넓은 강당의 벽면에 붙은 그림들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내가 그림들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면서 걸음이 느려졌고
결국 내 앞에는 줄이 끊어져 버렸다.
그러자 인솔했던 교사는 내 발걸음을 재촉했고
나머지 그림들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림들의 이미지는 선명하게 내 머릿 속에 남았다.
나는 그림에 빨려들었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도
나처럼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아주 신비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전시 회 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은 전시회는
그때의 전시회였던 것 같다.
그 다음은 아마도 도쿄의 모리 타워에서 보았던
빌 비올라(Bill Viola) 전시회였던 것 같다.

*

다시 비가 내린다.
이 비가 내리면서 기온이 떨어진다고하니
반갑게 느껴진다.

















2010/08/23 13:32 2010/08/23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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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ni 2010/08/30 02:3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사람 눈코입이 다그려있는 그림보다 저런 그림이 더 좋습니다.
    웬지 모를 정감도 있겠지만 저역시 그림을 못그려서 위안을 삼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요 근래 직장내 페인트칠을 직접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 지 모르겠습니다.. 정신이 영혼까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듭니다..직장 상사 말한마디에 ~ 정말 좌지 우지 되고 있는 형국이라 정말 정신없습니다

    • 마분지 2010/08/30 17:53  address  modify / delete

      아무런 제약 없이 막 그려댄 아이들 그림은 언제나 좋습니다.
      저역시, 데생이나 담채화 같은 걸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직장 생활도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야 오래 전에 직장을 그만두었으니 잘은 모르지만
      후배들 이야길 듣거나 하면 충분히 짐작이 가기도 합니다.
      힘내시고!

  2. 조복현(영민예나아빠) 2010/08/30 14:1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출구가 있군요, 출구로 걸어서 나오는 조끼입은 구피를 상상해봅니다. 토끼굴에 빠진 엘리스 표정으로...

  3. 조복현(영민예나아빠) 2010/08/30 14:1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집에 제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해놓은 토끼와 열차철로 낙서가 있습니다.

  4. 조복현(영민예나아빠) 2010/08/30 14:2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어제 엄청난 폭우속에서 캠핑을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면서 아내에게 이런말을 했습니다.

    영민아빠: '어렸을때 빗속을 뛰어다니며 즐거워 했던것처럼 어른이 된 지금도 비를 맞고 뛰놀고 싶은 생각을 해...
    그런데 막상 비가 오면 비를 못맞겠어,,, 왜냐고 물어봐,

    영민엄마: 왜?

    영민아빠: 핸드폰 젖잖아...
    ......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동심이 사라진것은 아닌것같은데...
    물질,자격,경험과 같은 형태로 소유되고 있는것들에 의해 동심이 방해되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로 적어도 될 댓글을 3개로 분활해서 적었군요. 아름다운 오후가 되시길 빕니다^^; )

    • 마분지 2010/08/31 02:38  address  modify / delete

      그런데 Exit가 사실은 진짜 출구가 아니라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ㅠㅠ
      사실, 저 낙서된 어항에 '세계'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비극적인 세계관이라는 생각이 드네요...ㅠㅠ

      *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집에 어릴적 남긴 낙서라니...
      그런 걸 보면 기분이 묘할 것 같습니다.
      제가 살던 집은 아직 남아있긴 한데
      칠을 다시하고 보수를 해서
      옛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

      몽땅 젖으면서도
      빗속을 뛰어다니던 시절이 있었는데
      살아갈수록 이런저런 것들이
      그런 천진한 행동을 못하게 합니다.
      가끔은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는 곳에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말씀처럼 '동심'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을 겁니다.
      같이 놀아주기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동심이 많이 심심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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