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이야기, 하나

from 이야기 2011/01/12 23:23
문을 열거나 닫으면
벽에 걸어둔 기타가 조그만 소리를 냈다.
그 겨울, 혼자 쓰던 썰렁한 방에
나 아닌 그 누군가 있어서
내게 인사를 하는 것 같아
조금은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재채기를 해도 기타 줄이 쨍,하고 울렸다.

어머, 감기 걸렸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처음 맞이한 겨울 방학,
그 어렵다는 '수학의 정석'과 '성문 기본영어'를 펴놓고
조금씩 보다가 지루해지면
기타를 내려 가만가만 튕겨보았다.
B7과 F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그 기타는 원래
나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탐내던
친구 녀석의 것이었다.
나의 첫 라디오를 기타와 바꾼 것이었다.
합판으로 만들 클래식 기타였다.
서투른 아르페지오로 줄을 튕기면
기타 소리는 충분히 그 방을 울려주었다.

그 겨울,
아버지 장례식 때 들어온 
부조금이 다 떨어지자
어머니는 우유 배달을 시작하셨다.
내 책상 옆에는 어머니가 배달하시는
우유가 쌓여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허락한 것보다
우유를 더 많이 먹어 살이 제법 붙었다.
중학교 졸업 사진을 본 나는
살이 붙은 내 모습이 싫어졌다.
어린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살이 찌는 건 죄악이야.



                                                - 어린 날의 기타, 2010

사실, 기타를 처음 잡아 본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사촌 형에게 Am, Dm, E7의 코드 진행과
고고(gogo)리듬을 배웠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 겨울 방학,
내 기타가 생기고서야
거의 모든 기본 코드들을 익혔다.
여전히 서툴렀고
코드를 바꿀 때 박자를 놓치곤 했지만
반주 정도는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타를
사우디에 기술자로 다녀온 사촌 형이 빌려갔고
클래식 기타에 스틸 스트링을 끼워서
브릿지가 망가져 버렸다.
기타가 망가졌으니 허전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는
비닐 케이스에 싸인 기타를 들고 오셨다.
레코드 가게를 하시는 동네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싸게 장만하신 것이었다.
역시 합판으로 만든 클래식 기타였지만
주황 색이 감도는 예쁜 기타였다.
'배영식 클래식 기타 교본'을 구해서
조금씩 연습 하기도 하고,
가요 책을 보며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 후,
하교를 해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올 때면
기타 교습소가 있는 횡단보도에서
버스가 멈추곤 했다.
그 교습소 밖에는 스피커가 있어서
'로망스'니 하는 소품들이 들려왔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대로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
그 정도의 소품들은
스스로 배워 어슬프게 연주할 수 있었지만,
오직 하나의 악기로 만들어지는 세계,
혼자 끌어안고 튕겨주면 열리는
모자랄 것 없는 그 우주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기타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교습비는 어머니가 부담하기에
만만치 않은 금액이어서
차마 조르질 못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내 기타는 별로 늘지 않았다.
아직도 고등학교 때의 아르페지오에서
머물고 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때 내게 기타는 연주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아픈 줄도 모르고 앓았던 그 겨울에
나를 안아주었던 유일한 친구였던 것이다.
교습소에 보내 줄 형편이 못되던 가난한 어머니가
기타를 좋아하는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내게 기타는 그러하다.
외로운 나를 안아주던 오랜 친구,
가난한 내 어머니의 사랑.

세상에서 단 하나의 물건만 고른다면
아마도 난 기타를 선택할 것이다.
연주 실력은 형편 없지만.








 



海の見える街/ 魔女の宅急便 中

누구의 연주인지는 모르나 이 곡을 들으니
바다가 보이는 어린 시절의 거리로 내려가고 싶다.
물론 음악의 이미지와 그곳은 다르지만...

 






2011/01/12 23:23 2011/01/12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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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ni 2011/01/13 21:3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마분지님 오늘도 역시 날씨가 차네요
    책 주문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추천해드리는 음반 도 같이 보내드립니다.
    저역시 인터넷으로 알게됐던 음반인데.. 어떠실까 해서 같이 보내드립니다.
    직접 손글씨로 내용을 적어 드리고 싶었는데.. 부득히 인터넷으로 주문 발송해 드립니다.
    제주소는 마분지님 소포 받으신후 보내드리겠습니다. 올겨울 가족모두 건강하게 보내세요

    • 마분지 2011/01/14 15:22  address  modify / delete

      음반까지? 어떤 음악일지 궁금하네요.
      이렇게 받아도 되는건지...감사합니다.
      마치 빙하기가 온 것 같은 날들이었습니다.
      오늘은 그나마 조금 따뜻해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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