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순간

from 이야기 2011/03/30 05:16

하나.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집에서 한참을 걸어
두 갈래 길을 만났다.
왼편의 길은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이었고
오른 편은 오르막 길이었다.
두 길은 결국 나중에 만나게 되어있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온 세상이 보이지 않은 어떤 힘에
충만해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 힘은 하늘과 바다는 물론
거기 서 있는 나까지 관통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어떤 상상이나 관념과는 달랐다.
보이지 않은 어떤 힘을
감각한 경험.

둘.

아마도 1년 후였을 것이다.
가파른 길을 오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다 문득,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그 지점 이외에는
모두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었고 어두웠고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어둠에 잠겨든 것만 같았다.




그 후로 두 개의 순간은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서로 상충되는 세계가
내 속에서 정돈되지 않은채
싸우고 으르렁거리곤 했다.
우주에 충만한 생명과
우주에 가득한 죽음.

나중에 스무 살이 넘어서
이 상충되는 감각을 하나로 묶어보려고
잠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적이 없었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삶이란 것은 강박적 통일성 위에
설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조금씩 깨달아 왔다.

*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걷겠다고 살아온 10년,
팍팍하고 힘들었지만
아마도 나는 생명으로 가득한
시간을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다 올 해 들어서
주변에 온통 어둠이 가득하다고 느꼈다.
2월 초 길을 걷다 쓰러진 적이 있었고
건너건너 아는 이가 쓰러져
세상을 뜬 경우도 있었다.
이땅의 도처에서 죽음의 소식이 들리고,
바다를 건너 온 지진과 쓰나미,
방사능의 소식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어두운 밤,
침묵으로 가장한 채
적의를 내뿜고 있는 어두운 숲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숲을 지나가는 법은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나아가는 길 밖에 없을 것이다.

*

가끔 한 사내를 떠올린다.
가장 어둡던 밤,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
흐린 길을 서둘러
사람들의 마을로 돌아가던
그의 걸음을 떠올린다.

지난 겨울, 밤 길을 걸으며
중얼거리곤 했다.
겨울 찬 바람은 나의 것,이라고.

가자, 이 어둠 속을
걸어가자.





 

2011/03/30 05:16 2011/03/30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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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ni 2011/03/30 21:0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역시 같은 직종을 15년 넘게 해오고 있지만 어느날 뒤를돌아보니 제가 벌써 떠나야할 입장이 된것도 같습니다. 아직은 다른일을 생각해본적이 없는데.. 언젠가 떠나야할 날 때문에 살짝 겁이 나기도 합니다.
    다른길을 곰곰히 생각좀 해봐야 하는데 아직은 겁이 납니다..

    근데 마분지님 무슨일을 하는지좀 여쭤봐도 될까요?

    • 마분지 2011/03/31 17:20  address  modify / delete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게
      변환 스위치를 누르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전에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오랫동안 일을 했고,
      몇 년 전부터 사무실을 열고
      이것저것 하고 있습니다.
      아직 광고 쪽 일이 많네요.
      인쇄물을 만들기도 하고
      여전히 카피도 쓰구요.
      개인적인 작업을 점점 더 넓혀가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지지부진한 것 같습니다.
      자본이거나 특정한 이들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자극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작은 인간들의 삶에 기여하는
      이미지를 다루고 싶다는
      마음이었죠.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암튼,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합니다.
      지금 작업하는 다큐도 것도
      그런 걸음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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