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의 죽음

from 나날 2011/02/09 11:59


단칸방에는 채 마르지 않은 수건이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온기는 느낄 수 없었다. 이미 가스가 끊긴 지 오래여서
음식을 해 먹은 흔적도 없었다. 마실 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설을 앞둔 지난달 29일, 유망한 예비 시나리오 작가 최아무개(32·여)씨는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의 월셋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미 몇 달째 월세가 밀린 상태였다.
형편을 딱히 여긴 인근 상점 주인들이 외상을 주기도 했지만
최씨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깡마른 상태로 숨진 최씨를 발견한 사람은
같은 다가구주택에 살던 또다른 세입자 송아무개(50)씨였다.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최씨는 사망 전에 송씨의 집 문 앞에 이런 내용의 쪽지를 붙여놓았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송씨가 음식을 챙겨 왔지만,
이미 최씨의 몸은 싸늘해진 상태였다.
최씨가 누운 자리 옆으로 열이 식은 전기장판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동네 주민들도 최씨의 모습을 본 지 사나흘이 지났을 때였다.

송씨의 신고를 받은 안양시 만안경찰서는 갑상선 기능 항진증과
췌장염을 앓던 최씨가 수일째 굶은 상태에서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씨가 일하던 영화계에 이런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그의 지인들 사이에서는 최씨를 열악한 환경으로 내몬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탄식이 쏟아졌다.
극소수를 제외한 예비 영화인들은 생계조차 이어가기 힘든 대우를
참아내야 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최씨의 선배인 한 현역 영화감독은
“신인 작가들은 2000만원 정도인 계약금의 극히 일부만 받고
시나리오를 일단 넘긴 뒤 제작에 들어가야만 잔금을 받을 수 있다”며
“제작사가 좋은 시나리오를 묶어두기 위해,
기약도 없는 제작 일정까지 작가 같은 약자들에게
부담을 떠넘기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최씨는 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영화과(시나리오 전공)를 졸업한 뒤 실력을 인정받아
제작사와 일부 시나리오 계약을 맺었지만,
영화 제작까지 이어지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려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최씨는 평소 지인들에게
“(영화화된 것으로 보면) 나는 5타수 무안타”,
“잘 안 팔리는 시나리오 작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지난 1일, 최씨의 유가족들은 충남 연기군에 있는
은하수공원에서 최씨를 화장했다.
박종원 한예종 총장과 이창동, 김홍준 교수를 비롯해
한예종 영상원 동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유가족들에게 건넸다.
최씨를 아꼈던 선후배들은 그가 직접 쓰고 연출한
단편영화 <격정소나타> 상영회와 유작 시나리오 읽기 등
추모 모임을 열 예정이다.

최씨의 작품을 좋아했다는 후배 작가 윤아무개씨는
트위터에 추모글을 남겼다.
“그녀의 <격정소나타>는 단편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내겐 훌륭한 참고서 같은 영화였다.
언젠가 판을 기웃거리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구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행복하시기를.”

한겨레 신문, 홍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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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복을 빈다는 말조차
차마 나오지 않는다.

살아있는 모든 자들은
죽어간 이들에 대해
살인자이다.

슬프다.



2011/02/09 11:59 2011/02/09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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