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1일 대지진이 일어난 지 벌써 18일이 지났다.
예전 같으면 이젠 이재민 구출이라는 초기 작업단계에서 생활 복구,
그리고 재건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어야 할 때지만
아직 그럴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피해지역 사람들은 좀체 닿지 않는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거기서 200㎞ 떨어져 있는 도쿄에 사는 나와 같은 사람도
무겁게 드리운 구름같은 불안 속에 잠겨 있다.

불안 요인들은 몇 개라도 들 수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원전사고가 수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제는 원자로 건물 바깥에 고여 있는 물에서
아주 위험한 고농도의 방사선이 검출됐다.
이것을 제거하지 않고는 원자로를 안정시키는 작업을 진행할 수 없는데,
도쿄전력은 지금 뾰족한 수가 없는 모양이다.
이대로 가면 장기간에 걸쳐 외부환경 속에
고농도의 방사선을 흩뿌리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될 경우 도쿄도 안전할 수 없다.
그리하여 몇 개월이나 몇 년이 아니라 수십년 이상
환경과 인체가 심대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경제의 몰락과 사회의 황폐화도 불가피하지 않을까.
이미 그런 프로세스(과정)가 시작됐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런 불안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당사자인 도쿄전력의
참으로 한심한 무기력과 정치 리더십의 부재다.
당초엔 가능한 한 사태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해서 발표하던 정부도 요즘엔 톤이 바뀌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마다라메 하루키(斑目春樹) 위원장은
28일 기자회견에서 고농도 오염수가 원자로 건물 바깥에서 발견된 것과 관련해
"정말 놀랐다. 걱정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케다 경제산업성 부대신(副大臣)은 28일 국회에서
원전사고 수습 전망에 관한 질문을 받고 "신만이 알 것"이라고 대답했다.
즉 이미 책임있는 당사자들에게도
사태수습의 전망이 서지 않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파국이 임박했다.
그럼에도 도쿄만 보면 거리는 기묘할 정도로 평온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한겨레> 한승동 기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시의적절한 질문이 날아왔다.

지진 발생 직후부터 지금까지 극도의 공포와 어려움 속에서도
일본인들이 비교적 평정(平静)을 유지하고 사회질서를 잘 지키면서
타인을 배려하고 있다는 국제적 찬사를 받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인가? 만일 사실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봐야 하나?
또한 이번 사태가 향후 일본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는가?
그것은 어떤 정치적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며,
민주당 정권은 새로운 정치를 선도해 갈 수 있을까?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얘기해 보려 한다.
다만 이것은 내가 도쿄의 한 켠에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에 한해서 얘기할 뿐이다.
재난지역 한복판으로 들어가 본다면 또다른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재난지역 현실을 미디어가 있는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지금은 쉬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곳 도쿄에서 보는 한 지금까지 일반인들이
비교적 평정을 유지하고 질서를 지키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이것 자체는 매우 다행스런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평정이 계속되리란 보증은 없다.
또 타국민과 비교해 이를 '일본인'이라는 국민이 지닌 우수성인 듯 얘기하는 것,
즉 '국민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잘못이며, 위험하다.
재난지역인 도호쿠 지방에서는 당초의 타격이 너무 컸기 때문에
정신적인 허탈상태가 오래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보도를 통해서 볼 때는, 재난지역의 강인한 인내와 현지 공무원,
의료관계자, 복지관계자 등의 헌신은 확실히 놀라울 정도다.
분명 찬사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그저 묵묵히 참고 있는 건 아니다.
식량, 연료, 의약품, 의류, 정보 등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그런 상태가 지진 뒤 2주일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기본적으로 개선되지 못한 채 계속되고 있다.
피난소에서 동사하는 이재민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의 울분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재민들의 절실한 요구를 미디어는 너무 외면하고
그들이 묵묵히 참아내고 있는 모습만을
미담으로 소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재난지역들 중 다수가 도호쿠 지방 어업지대와 북 간토(관동)의 농업지대이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일본사회 전체로 보면 주변화된 사람들이다.
공동체적인 상호부조의 유대가 남아 있지만
목청을 높여 자기주장을 하는데는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또 살아남은 사람들 다수가 고령자,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인 점도 평온하게 보이는 요인의 하나일 것이다.
원래 수동적으로 처신하도록 강요받아온 그들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요구할 힘 자체를 박탈당했다.

그렇지만 마침내 요 며칠 연료를 서로 빼앗고
무너진 가옥이나 창고에서 금품이나 식료품을 훔치는 행위들이
눈에 띈다는 보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어난 건수는 보도된 것보다 많을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곤경이 장기화되는 향후에도 지금처럼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예단할 수 없다.

이런 재난지역 상황과는 달리 도쿄처럼 직접적인 피해를 면한 도시에서
사람들이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도쿄 사람들에게 지진과 해일(쓰나미) 피해는
자신들에게 직접 닥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쇠퇴 경향을 보이긴 했으나
일본은 여전히 풍요로운 나라이고,
일반인들도 피해자들에게 손을 내밀 정도의 여유는 있다.
만일 '일본인'이 대재난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 국민보다
비교적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 가장 큰 이유는 그런 '여유' 때문일 것이다.
도쿄가 이번 규모의 재난에 직격 당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자신의 생사가 갈릴 정도의 위기 속에서도
마찬가지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근거는 없지 않을까.
이 여유 있는 도시인들도
자신이 직접 그런 사태를 당할 상황에 처하면 양상은 바뀔 것이다.
원전사고가 수습되지 않고
수도권도 방사능 오염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슈퍼마켓에서 생수가 사라졌다.
정부와 자치체가 거듭 "이재민들이 먼저 살 수 있도록
사재기 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호소하고 있으나
별로 효과가 없는 듯하다.
아직 서로 빼앗기 싸움 현장을 목격하진 못했으나
앞으로 사태 진행에 따라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일이다.

즉 목청을 높일 수 없을(목청을 높여봤자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피해를 입은 이재민의 평정과 아직 비교적 여유가 있고
재해를 남의 일로 여기는 도시인들의 평정이라는,
차원이 다른 것을 묶어 '일본인'이라는 국민의 특징처럼 묘사하는 건 문제가 있다.

도시인들이 평정을 유지하는 두 번째 이유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철두철미 기업체에(그리고 기업체를 통해 국가에)
포섭된 존재라는 점이다.
지진이 일어난 날 밤, 또는 계획정전으로 교통이 대혼란을 일으킨 날,
많은 사람들이 불평도 없이
평소의 몇 배나 되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직장에 출퇴근했다.
확실히 놀라운 일이다.
나 자신, 왜 이 사람들이 지금 바로 도망가지 않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생각해볼 것도 없이,
이런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도시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품이다.
공무원, 의사, 철도원, 신문기자 등에서부터 택배업자,
편의점 판매원에 이르기까지
그들 부품 중 어느 하나가 없어져도
일상생활은 졸지에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엄청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출근해서 평소처럼 일을 해주고 있기에
내 생활도 유지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그런 사명감, 책임감 때문에 출근하는 것일까?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직업적인 사명감이나 책임감보다
오히려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아이덴티티 영역까지 깊숙이 침투한
기업체에 대한 귀속의식과 같은 것의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회사는 그들에게 노동의 대가로 급료를 지불해주는 조직일 뿐만 아니라
보험과 연금 등 복지에서 정보수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생활의 유일한 기반이다.
어민들이 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농민들이 논밭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은 회사를 떠날 수 없다.
자동차나 휴대전화가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없듯이
회사에 소속되는 것 외의 인생의 선택지를 생각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위기 때에도(또는 위기이면 일수록)
회사에 나가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사태를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까지도
회사의 지시나 동료의 동향을 보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위기 속에서도 회사가 조업을 계속하고 있는 한
출근하고, 회사가 피신하라고 명하면 서둘러 피신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자신의 생사를 건 판단까지도
회사에 맡겨버린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평정(평온)은 사고정지의 산물이 아닐까?

몇 시간 걸리는데도 푸념도 불평도 없이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왜 무리하게 출근해요?" 하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듯 “어쩔 수 없으니까”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정직한 답이다.
말할 것도 없지만, 나는 그들을 비난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것도 또한 일본사회가 제1차 산업을 버리고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해온 결과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책임감이 강한 시민이라는 측면과
기업체에 속박당한 수인(囚人)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다.
이 양면을 보지 않고 전자만을 '일본인'의 특성으로 강조하는 것은
정확한 시선이라 할 수 없다.

회사에 대한 이런 귀속의식은 국가에 대한 귀속의식에 연결돼 있다.
그들 중 다수는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고, 능동적인 보수파도 아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지금까지 회사와 국가가
얘기하는 대로 해서 결국 잘 살아왔으니까…"라는 정도일 것이다.
어려운 결정은 회사나 나라에 맡겨 두고,
당장 지금이 괜찮으면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순응주의에 통째로 푹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앞으로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격차사회(양극화) 문제로 시끄러웠으나
그것도 비정규직 얘기로, 다수의 정규직들이 볼 때는 남의 일이다.
국가와 전력회사, 그리고 과학자들이 결탁해서 유지해온 원전추진정책에 관해서도
그들 다수는 수익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원전반대운동에도 관심이 없었다.
부담을 지방에만 떠넘기고 불평하면 보조금을 주어
입다물게 하는 방식을 암묵적으로 승인해왔다.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떠넘기고
자신들은 허구의 평화를 누리는 구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이 지금 근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인데,
그들의 무관심과 생활 보수주의의 껍질은
고도경제성장과 함께 거의 40년, 두 세대에 걸쳐 침투해온 것이다.
여간해서는 그 딱딱한 껍질을 깨부수지 못할 것이다.

독일에서는 이미 25만명 이상이 원전반대 시위를 벌이고
지방선거에서도 원전반대파가 승리해 메르켈 정권은 정책 전환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런데 지금 생명이 위험에 노출돼 있는 일본 사람들 가운데서는
그런 움직임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
2, 3일 전에 도쿄전력 본사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나
참가자는 1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그것은 주요 신문에선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이번과 같은 엄청난 위기 속에서도
자신들의 생명과 생활을 지켜내기 위한 주장을 펼칠 수 없다면,
그건 국가와 기업에겐 안성마춤의 '미풍(美風)'이 아니겠는가.
이런 '일본인의 미풍'을 과도하게 예찬하는 사람들의 저의를
의심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난지역에서 슬픔을 참아내고 있는 사람들 모습을 보노라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활동에는 머리가 숙여진다.
이재민들에 대한 배려가 확산되고 있는 것도 감동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들이 훌륭한 것이지
'일본인'이라는 국민이 훌륭한 건 아니다.

도쿄도(都)의 이시하라 신타로 지사는 지진참사가 일어난 직후
이번 쓰나미가 '일본인의 욕심(我欲)'을 씻어내려는 '하늘의 벌(天罰)'이라고 말했다.
국가주의자인 그는 '일본인'이라고 하나로 묶어버리는 걸 좋아한다.
무서운 피해를 당해 고통받고 죽어가는 건 도호쿠지방 사람들,
특히 고령자와 어린이들이고,
욕심을 반성해야 할 권력자는 그 자신인데도
'일본인'으로 묶어 그런 차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시하라는 그 발언에 대한 비판이 빗발치자 사죄했지만,
곧 바로 차기 도지사 선거에 입후보했다.
결과는 아직 모르겠으나 당선이 유력시된다.
오사카부(府) 의회 의장은 지진 피해로
동일본의 경제가 타격을 받은 지금이야말로
서일본에 있는 오사카에겐 돈을 벌 찬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것도 비판받고 사죄했으나, 그게 솔직한 속내였을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은 많다.
이시하라 지사나 오사카부 의장도 이재민도 모두 '일본인'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의 미풍이란 게 정말 존재할까?

다른 예를 들어보자. 1980년 광주 민주항쟁 때
계엄군에 포위당해 고립된 광주 시민들이 발휘한 자율적인 질서의식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는 참으로 경탄스러운 것이었다.
그 광주시민이 '한국인'이라면 그들을 학살한 것도 '한국인'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자랑스러워 해야 할 존재인가, 아닌가.
여기서 '한국인'이라 포괄해버리는 방식의 문제성이 쉽게 드러난다.
하나의 민족이나 국민 속에는 자랑스런 미덕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고
마음이 얼어붙을 정도의 잔혹성을 분출하는 자도 존재한다.
우리에게 지워진 과제는
'어떠어떠한 사람'이라는 조잡한 포괄 속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어떤 조건하에서 자발적 도덕성을(또는 '야만성'을) 발휘하는가 하는 것을
냉정하게 지켜보는 일이다.

미증유의 재난 속에서도 '일본인'이 발휘하고 있는 도덕성이라는 언설의 이면에는
다른 국민이나 민족에 대한 편견이나 멸시가 숨겨져 있진 않을까?
인도네시아나 아이티의 재해 때 정말 얼마만큼의 '야만성'이 발휘됐는지
누가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일본에 대해서는 앞서 얘기했듯이 아직 판단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첫머리에서 얘기했듯이, 다행히 아직 소규모인 듯하지만,
재난지역에서는 물자 빼앗기나 도난 사건도 일어나고 있다.
어떤 텔레비전 프로는 무너진 창고에서 컵라면을 훔쳐 달아나는
고교생들 모습을 비춰주기도 했다.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다른 보도에서는 자동판매기를 깨뜨려 음료수를 훔친
젊은 사람 얘기를 전했다.
만일 그런 장면만 선정적으로 보도한다면 얼마든지
'일본인의 야만성'이라는 이야기를 지어내 유포할 수 있을 것이다.
기자가 그 젊은이 뒤를 뒤쫓아 가봤더니
그는 훔친 음료수를 피난소 이재민에게 주었다고 한다.

<재난 유토피아>(레베카 솔니트 지음, 아키쇼보 亜紀書房)의 지은이는
과거의 사례를 검증하면서,
큰 재난을 당한 현장에서 약탈과 치안 악화가 진행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썼다.
거의 모든 재난지에서 발견되는 건 오히려 무수한 이타적 행위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은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도 스스로 배려를 한다.
그런 상태를 무너뜨리는 건 "사람들이 야만인으로 바뀔 것"이라 믿고
패닉상태에 빠지는 엘리트층이다.
그는 그렇게 지적한다.
이 책에 씌어져 있는 게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지금 나로서는 단언할 순 없다.
다만 '일본인'이 도덕적이라고 과도하게 상찬하는 언설은
이런 엘리트층의 패닉이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언설에 도대체 무슨 근거가 있는지를 물어봐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지진 이후 텔레비전에서는 공익광고라는 게 계속 방영되고 있다.
스포츠 선수나 록 가수가 등장해 "일본은 강한 나라다"
"힘내라, 일본"등을 외쳐대는 것이다.
이런 광고를 볼 때마다 나는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거기에다 "자위대원 여러분께 감사합시다"
따위의 소리들까지 나오면 더욱 그렇다.

지진 피해를 당한 건 '일본인'만이 아니며,
열심히 애쓰고 있는 것도 '일본인'만은 아니다.
이런 포괄적인 레토릭을 통해 국민적 단결을 고무하고
곤경을 극복하려 하겠지만 그 단결을 위해 '국민의 적'이 필요하다는 건 당연한 이치다.
현재의 사태가 전쟁 때문이라면 간단히 '적'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미국에서 9.11 사태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떠올려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슬람'을 '적'으로 삼아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불법적인 전쟁까지 감행했다.
그 결과 수십만의 이라크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이번 재난은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적'을 만들어내기는 간단치 않다.
그러나 앞으로 곤경이 장기화하고 지배층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쌓여가면
필시 '적'을 만들어내려 할 것이다.
거기에 반대하는 국민은 '비국민'이 될 것이다.
그것이 예나 제나 권력의 상투수단이다.
지진 피해가 비교적 단기간에 종식됐다면 그다지 걱정할 게 없었을지 모르나
원전사고와 그 파급효과로 꽤나 장기간에 걸쳐 혼란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재건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증세, 경제 악화에 따른 임금 삭감과 대량실업 등으로,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사회적 격차가 더욱 극대화되고 고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 가운데 대중 불만의 배출구가 될 '적'을 찾아내 이용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넣으려는 포퓰리스트가 나타날 것이다.
그럴 때 '적'으로 간주돼버릴 가능성이 높은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다.
재일조선인은 단지 소수자일 뿐만 아니라
'북조선(북한) 배싱(때리기)'에 함께 포함될 대상이며,
"언제까지고 과거 식민지지배를 문제 삼을 성가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일본에서 이재민들을 예외로 하면
'조선적'의 재일조선인만큼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진 재난 이후 일본 거주 외국인들에게는 그들 본국 정부가 안부를 확인하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독일인, 프랑스인, 한국인, 기타 외국인들 중
일본에서 피신할 수 있는 쪽은 피신했다.
중국정부는 니이가타에 임시영사관을 개설하고
특별기를 보내 자국민 보호에 나섰다.
이는 그런 나라들이 일본과 국교를 맺고 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재일조선인(조선적)에겐 몸을 피해 돌아갈 장소도 없고
보호해줄 국가도 없다.
(북조선 정부가 조선총련을 통해 재일조선인에게 위로금을 보내고,
적십자를 통해 이재민에게도 위로금을 보낸 정도다.)

15년 전 한신(오사카-고베) 대지진 때도 그러했지만,
실은 나는 이번에도 마이너리티(소수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지 않을까 긴장했다.
지금까지 그런 사례가 보고되고 있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아직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 "외국인 절도단이 재난지역에 들어갔다"는 따위의
근거없는 선동이 떠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로 대량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안한 것은
이시하라 신타로와 같은 인물이 수도의 지사라는 사실이다.
1923년 9월1일 간토(관동) 대지진 때
6000명 이상의 조선인, 200명 이상의 중국인,
무정부주의자 등과 수십명의 일본인이 학살당했다.
그 학살은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있다"
"우물에 독을 집어넣고 있다"는 유언비어에서 시작됐고,
그것을 관헌이나 언론이 증폭시켰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지금까지 사건의 진상조사나 사죄,
보상 등을 한 적이 없다.
게다가 이시하라 지사는 2000년 자위대원들에게 훈시하면서 이런 말도 했다.
"오늘 도쿄를 보면 불법입국한 많은 삼국인(三国人),
외국인들이 몹시 흉악한 범죄를 계속 저지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 큰 재난이 닥치면 큰 소요사건까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한다."

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은 이유도 없이 일방적으로 희생당했다.
일본인을 해친 일이 없다.
그런데도 이시하라 지사는 조선인 등 외국인을 경계하라고
자국민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인종간 민족간의 적의를 선동하는 이런 발언을
지사라는 고위공직자가 내뱉는 것은
유엔 인종차별금지조약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지만
이시하라 지사는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고
그 뒤에도 많은 득표수로 지사에 재선됐다.
이런 인물을 지도층으로 받드는 사회,
이런 인물이 이렇다할 비판도 받지 않는 사회,
그런 곳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가 될지 상상해 보기 바란다.
더욱이 이번과 같은 '큰 재해'가 일어나고
그것이 당분간 수습될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시하라 지사와 같은 존재, 그를 지지하는 다수자(머조리티)의 존재는
후쿠시마의 원자로에 뚫린 구멍처럼
우리에게 끊임없이 긴장과 불안을 안겨주고 있다.

매스컴에는 이번 재난을 패전에 비유하는 언설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것은 예외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패전 뒤의 '재건(부흥) 이야기'와 하나의 세트가 돼 거론된다.
저 패전 뒤 파편과 자갈 더미 속에서
우리 '일본인'은 근면성을 발휘해 재기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도 매우 자기중심적이지 않은가.
일본인 다수가 근면하다는 건 사실이겠지만,
그 전후 부흥은 전쟁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해주지 않고
동서대립의 비용(조선에서는 조선전쟁이라는 열전이 일어났다)을
조선, 오키나와, 베트남에 전가시키면서 실현한 것이었다.

패전 뒤 미국은 오키나와를 자국의 극동 전략거점으로 계속 점령하려 했다.
지금의 헌법 초안을 일본 쪽에 제시하는 과정에서
미국 고관은 일본 쪽에 "Let's enjoy Atomic sunshine"이라고 했다.
"함께 원자의 햇살을 즐기자"는 얘기다.
그 의미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 뒤에 출현한 공간을
두 나라 지배층이 함께 향유하자는 것이다.
그 양지의 그늘에서 재일조선인 등 옛 식민지 출신자들은 배척당했고,
점령이 이어진 오키나와, 분단당한 조선은 계속 고통 속에 놓여 있다.

전후 일본 재건 이야기에는 이런 떳떳하지 못한 그늘이 은폐돼 있으나
지금 재건(부흥)의 비유를 입에 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자각은 없다.
항상 '일본인'을 자찬하는 자기애(自己愛) 이야기로 수렴되는 것이다.
국민 다수가 이런 자기애에 빠져 있으면, 또다시 희생을 주변에 전가하면서
특권층이 부흥 특수를 누리며 살찌는 구도가 되풀이될 것이다.

지진이 일어난 지 2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
간 나오토 정권을 비판하는 소리가 마침내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매스컴은 '일본인'의 단결을 우선하는 자기검열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러나 재난지역에 대한 대응이 서툴러
2주일이 지나도록 구원물자가 당도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터져나오는 의문의 소리들을
역시 억누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이상으로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도쿄전력의 무책임과 정권의 무능이 상호 증폭작용을 해서
피해를 수습 불가능한 수준까지 악화시키고 있다.
초기에는 정보를 제대로 전해주기를 꺼리던 도쿄전력과 정부도
국제적인 주시까지 받자 이제 더는 사태의 심각성을 감출 수 없게 된 것이다.

지진과 해일은 천재지만 구원활동 지체와 원전사고는 인재다.
이런 시각이 요 며칠 대세가 돼 가고 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간 나오토 내각이 아니었다면,
자민당 정권이었다면 훨씬 잘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특히 원전에 대해서는 그러하다.
일본 원전정책은 자민당 장기정권과 전력회사, 과학자,
그리고 지방정치가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유착의 산물이다.
그 오랜 세월 썩어온 고름이 이번에 최악의 형태로 터져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2007년에 니이가타현 가시와자키 가리와 원전에서도 사고가 일어났는데,
그때도 도쿄전력은 정보를 은폐하려 했다.
당시 집권당은 자민당이었다.
그 교훈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원전정책의 전면 폐지를 포함한 재검토는
정치가, 기업, 관료, 학자, 지방유력자 등의
암반처럼 단단한 기득권을 파괴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 당사자들인 자민당 손으로 가능할 리가 없다.

게다가 정권교체를 실현한 민주당도 또한 환경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원전을 에너지정책의 중심에 앉혔다.
또 베트남에 대한 원전 플랜트 수출협정을 체결한 것은
간 나오토 정권이 자랑하는 작은 성과의 하나였다.
그런 것들의 근본적인 재검토 압박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인들 그것을 해낼 수 있으리라 보지 않는다.

이번 지진 이전부터 국회의 '꼬임 현상(네지레. 참의원에서 민주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해 빚어지는 현상)' 때문에
민주당은 그 공약 대부분을 후퇴시키든지 취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민주당 자체가 내부에 심각한 갈등을 안고 있고
일관된 전망을 제시할 수 없어 통치능력 부족을 노정해 왔다.
국민에겐 마침내 퇴출당한 자민당 정치로 다시 회귀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능한 민주당을 계속 지지할 것인가, 라는
불모의 선택지만 남아 극도의 무기력감이 만연하고 있다.
오사카와 나고야에서 기성정당과의 결별을 상품으로 내세운
포퓰리스트 지사가 인기를 얻은 것도 이런 현상이 부른 결과다.

'멜트 다운'이라는 비유를 굳이 쓴다면,
일본에서는 정당정치의 멜트 다운과 동시에 원전도 멜트 다운된 것이다.
누구도 이 상황에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민주당 정권의 서툰 짓에 짜증이 난 국민 사이에선
이미 '강력한 리더십'을 대망하는 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그런 소리는 앞으로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구원활동에 헌신하는 미군과 자위대의 이미지가 곧잘 소개되고 있다.
평화헌법하에서 오랜 기간 미군과 자위대는
일본국민의 심리적 알레르기(알러지) 대상이었으나
그것을 일거에 불식시키려는 듯하다.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를 타개할 묘안이 없어 고민하고 있으나
이번 기회에 그 흐름을 바꿔버리려 하고 있는 모양이다.
미군의 재난구원작전에 '친구 작전'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우스울 정도로 그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민주당은 후텐마 기지의 오키나와 현 바깥 이전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됐으면서도
그것을 철회한 하토야마 유키오 정권이 잃어버린 큰 점수를
만회할 수 있는 찬스로 여기고 있지 않을까.
지진재난을 구실로 또 다시 오키나와에 희생을 강요하려는 것일 게다.
오키나와 건은 지금의 일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일본 정치상황은 매우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여전히 평온하다.
현재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자그마한 희망은,
일반인들이 자율적인 시민으로 각성하고 다양한 사회운동을 벌여
정치의 멜트 다운에 대항해가는 것밖에 없는데,
그런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늘 신문에 어떤 사회학자의 다음과 같은 기고문이 실렸다.
"나는 2008년부터 후쿠시마 원전이 들어서 있는 지역에서
원전과 사회 관계에 대한 조사를 진행해왔다.
주민들에게 '가까이에 원전이 있는 게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많은 사람들이(중략) '도쿄전력 쪽이 빈틈없이 잘 해주고 있어서
아무 문제도 없다'고 대답했다.
이 지역에서 원전과 그 관련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주민 전체의 4분의 1이나 3분의 1 쯤 된다고 한다.
그런 현실에서 전문가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고도의 과학기술 결정체인 원전에 대한 시선은,
'나라가, 도쿄전력이 하는 일이니까 믿을 수밖에 없다'라는 일종의 신심(信心)이다.
일본 전체를 이런 애매한 '신심'이 뒤덮고 있다."
필자는 이 기고문을 "근거없는 '신심'을 이제야말로 버려야 할 때다"라는 말로 맺고 있다.
(가이누마 히로시開沼博, <아사히신문> 2011년 3월29일)

이것은 당연히 원전 입지지역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일본 전체를 뒤덮어온 전후정치 그 자체에 해당되는 얘기다.
일반적인 '일본인'들이 전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는 순종성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국가와 기업에 대한 '신심'을 버리는 게 가능할까?
자율적인 시민의 힘으로 파시즘으로의 전락을 막고 일본사회를
모든 구성원이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가는 게 가능할까?
그런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내 개인적 생각은 낙관적이지 못하지만 그것 외에는 희망이 없다.

덧붙여 얘기하자면, 한국은 프랑스 다음의 세계 제2 원전 대국이다.
거기에다 남북 분단에 따른 군사적 긴장까지 안고 있다.
지금 일본을 덮친 위기는 남의 일이 아닐 것이다. 과연 '한국인'에게는
이런 '근거없는 신심'이 없는 걸까? 그게 마음에 걸린다.

2011년 3월29일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한글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4월호에 실린 글.
줄이고 손보기 전 초안 번역.
출처: 세한송백


*

이시하라 신타로는
다시 도쿄 도지사로 당선되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나를 두 번 놀라게 했는데
처음은 학교 다닐 때 읽었던
이 사람이 쓴 '태양의 계절'이라는 소설의
난폭한 이미지를 접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그런 분방한 소설을 썼던 사람이
망언을 일삼는 우익 꼴통 정치인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

지난 일요일엔 도쿄 옆 고엔지에서 열린
원전반대 시위에 15,000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한국에 '가난뱅이의 역습'으로 알려진
마쓰모토 하지메씨가 주도한 집회였다고 한다.
이번 주엔 교토에서도
집회가 있다고 한다.

*

일본 원자력 사고를 보면서
80년대의 구호가 떠올랐다.
'반전반핵 양키고홈'(反戰 反核 Yankee Go Home).
1986년 전방 입소 반대시위를 하던
김세진씨는 이 구호를 외치고 분신했다.

방사능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하면
빨갱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꼴통들의 입으로부터
나오고 있는 것 같다.



2011/04/13 18:38 2011/04/13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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