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의 1호선

from 나날 2011/10/07 16:15


늦은 밤의 1호선엔
괴상한 캐릭터가 한 둘 쯤은 등장한다.
이번엔 이상한 젊은이였다.
특별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위에는 두터운 겨울용 오리털 점퍼를 입고
아래에는 반바지를 입었다.
어째서 저런 옷차림인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마치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
'을식이는 재수 없어'에서
네모 칸을 분지르고 나온 것 같다.
짧은 곱슬머리, 짙은 눈썹.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에 리듬이라도 맞추듯
계속 건들거리다가는
가끔 고개를 돌려
검은 창 쪽을 내다보곤 한다.

간간이 나트륨 등이 휙휙 지나가는
밖은 깜깜하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형광등이 비치는
차 안은 어둑어둑하다.

몇몇 얼굴 붉은 취객들이
소주 냄새와 섞인 고약한 안주 냄새를 풍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리고,
문 옆에는 아주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비현실적으로 빨간 립스틱을 바른
스물 한 두살 쯤의 여자가
숨은 듯 기대어 서 있다.

흐리고 푸르스름한 불빛에 눈은 침침하다.
조선족으로 보이는 맞은 편의 여자는
휴대폰을 조물락거리다 잠든다.

느닺없는 '비틀즈'라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해적판 CD를 파는 흰 머리의 사내.
전직 교수나 교사라고 하면 적당할 듯
곱게 늙은 그는 캐리어를 끌고
팝의 명곡 140여 곡이 담긴 CD를 만원에 판다.
통로의 가운데 친구들과 서 있는 여학생은
그가 크게 틀어놓은 음악이 짜증난다는 듯
얼굴에 주름을 만들며 일행과 함께 비켜 선다.
나는 과연 그 비틀즈가 어떨까 싶어
잠시 이어폰을 빼고 들어본다.
그런데, 존 레넌의 'Imagine'이다.
의외의 선곡이었다.
비틀즈라면 'Yesterday'
아니라면 'The end of the world' 따위를 틀어야
좀 팔릴 것 같은데...
어쩌면 전철에서 해적판 CD를 파는 일로
내몰리기 전에 그는
생김새처럼 음악 깨나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나도 팔지 못하고 지나간다.
잠시 후 나이키를 신은 젊은 사람이
던졌다가 잡으면 색깔이 변하는
공을 팔러 들어온다.
빨간 공을 던졌다 받으면 초록색 공이된다.
노란 공을 던졌다 받으면 파란 공이 된다.
몇몇 아저씨들이 그 신기한 공을 산다.
아이에게 선물하려는 마음일 것이다.

열한 시가 한참 넘은 시간,
영등포 쯤에서 미니 스커트는 내린다.
어쩌면 그녀는 단란 주점 같은 곳에
알바를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늦은 밤의 1호선은 침침하다.
노량진 역을 지나 한강을 건널 때에도
강변의 불빛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덜컹이며 피곤하고 지루한
하루의 끝을 향해 달리는 것이다.
차 안에 앉은 이들도
더러는 술에 취해, 혹은 피로에 겨워
졸거나 잠에 빠져들어 있다.

남영역을 지나 서울역에 진입하기 전
전철의 전등이 잠시 꺼진다.
국철과 지하철의 전원이 달라
그렇게 꼭 전원이 끊겼다가 다시 들어온다.
그 깜빡임에 나는
이전까지의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 흔들리던 모습들 모두가
잠시의 꿈결이었을까 싶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1호선은 계속 달려 종각역을 지난다.
모든 자동차와 전철이 우측 통행임에도
1호선은 좌측 통행이다.
역주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이상한 비현실감 속에서
1호선은 계속 달린다.
어쩌면 이 늦은 밤의 1호선에서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와
기무라 아츠키의 재즈를 듣는 내가
더 비현실적일지도 모르겠다.
늦은 밤의 1호선은
성북역을 향해 계속 달린다.

*

그젯밤,
수원에서 있었던
제 2회 장애인 음악제를 다녀오던
전철 안에서 본 것들.
음악제에 대해서는 좀 쓸까,하다가
다음에 음악제에서 일한
재필씨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

제 5차 희망버스.
부산영화제와 관련해
영화인들의 참여가 많다.
김진숙씨 트위터
@JINSUK_85



2011/10/07 16:15 2011/10/07 16:15
Tag // ,

Trackback Address >> http://lowangle.net/blog/trackback/577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mani 2011/10/08 15:2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는서울 올라갈때면 2호선을 자주 타게 됩니다.
    몇년전이나 지금이나 전철을 재빠르게 다니면서 돈을 걷으시던 노인분이 계시던데.
    너무 빨라서 줄틈이 없더라구요.. 그런데 몇년전이나 지금이나 레파토리가 항상 같은거 보고
    아 ~ 소리가 나왔답니다.. 가끔 전철을 보면 재밌고 신기한 캐릭터가 너무 많아서 만화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 마분지 2011/10/08 22:04  address  modify / delete

      2호선은 순환선이라 좋아합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거꾸로 가더라도 같은 역에 내릴 수 있죠.
      아는 사람이 술에 취해 잠시 졸았는데
      바로 다음 역이더래요.
      근데 시간을 보니 한 시간이 훨씬 더...
      한 바퀴를 돈거죠...ㅎㅎ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