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from 나날 2011/12/18 01:07


양산의 어느 병원 중환자실에서
수술을 앞두고 있던 큰 고모님을 뵈었던 날,
큰 고모님은 나를 자신의 막내 동생,
즉 나의 아버지로 착각하셨다.

누가 왔는지 아시겠어요,라고
어머니가 물었더니
알지, 내 망낭(막내) 동생 석형이,라고 하셨다.
그러다가 웃으시면서
석형이 너는 얼굴이 좋다,라고 덧붙이셨다.
치매가 고모님을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했는지
아버지의 어릴 때 이름을 부르셨다.
그런 고모님을 보면서
내가 아버지와 닮긴 닮았구나 
싶었다.

*

며칠 전에 어머니와 통화했다.
고모님이 수술을 마치시고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가셨으며,
전에 사시던 임대 아파트는
정리했다고 말씀하셨다.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선천으로 시집을 갔다가
지주 숙청으로 신의주로 쫓겨갔다가
38선을 넘어 해방촌에 살다
6.25가 발발하자 부산으로 내려와
그후로 60년을 영도에서 사셨다.
그리고 이제는 돌아올 곳 없이
요양원으로 가셨다.
이 땅에서 고모님의 집은
영영 사라진 것이다.

*

사실, 큰 고모님께
좋지 않은 감정이 많았다.
아버지를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어머니를 힘들게 하셨다.
어릴 때 맺힌 마음이 있었기에
다큐멘터리를 편집하면서도
큰 고모님이 나오는 부분에서
오랫동안 진전이 어려웠다.
다행히 얼마 전,
그 부분의 편집을 마쳤다.

고모님은
자신의 좋았던 점만을 기억하셨다.
자신이 가까운 이들에게
평생 잘 하고 살았다고 생각하셨다.
자신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것들은
거의 기억하지 않고 사셨다.
그러므로 기억의 괴로움은
남의 몫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아흔이 되도록
건강하셨는지도 모른다.

이 작업을 하면서
나는 여전히 푸념하곤 한다.
어쩌자고 내가 잘 알고
편치 않는 감정으로 얽혀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 했을까.
다른 작업을 시작했더라면
이미 여러 편을 만들었을 텐데...

하지만 나의 선택이었고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면 돌파하는 수 밖에.

기억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

사진은 2005년,
인터뷰 때 촬영했던
고모님 집 베란다 창.
저곳으로 들어 온 햇볕을 받으며
고모님의 이야기를 듣던
시간도 장소도
영영 사라졌다.
2011/12/18 01:07 2011/12/18 01:07

Trackback Address >> http://lowangle.net/blog/trackback/593

댓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