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라디오

from 이야기 2003/01/16 00:00


*

참 이상한 일입니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음악을 올리고
누군가 올린 음악을 듣다 보니
어린 시절의 라디오 생각이 많이 납니다.
옛날에 라디오로 듣던
노래들이 많이 올라와서 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인터넷이란 다양한 미디어의 채널이
융합되고 통합된 매체인데
어찌 라디오 생각이 난단 말인지...

어쩌면, 음악과 글을 올리시는 분들이
얼굴 모르는 분들이라는 데
어느 정도 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어두운 밤에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전파를 타고 흐르는 음악과 사연들을
듣기도 하고 오해도 하고 상상도 하는
그러한 정서가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러내고 보여주는 TV의 요란함보다는
라디오의 속삭임이 더 크게 들리는
그런 심리와도 관계가 있을 것 같구요.

*

어린 날 집에는 커다란 진공관 라디오가 있었지요.
선원들이 먼 바다에서 고향의 방송을 듣던
그런 성능좋은 라디오였습니다.
진공관에 발갛게 불이 들어오면서 들리는
그때의 음악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오후 내내 밖에서 놀다가 석양 무렵이 되어 집으로 들어오면
석양빛 같은 진공관 불을 밝힌 라디오가
그 빛과도 같은 노래를 방 안 가득
채워주고 있었지요.
비지스의 Too much heaven이나
진추하의 생명의 빛 같은 노래들이 기억이 납니다만,
아마도 무수한 노래들을 들었겠지요.

*

저의 라디오가 생긴 것은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 였습니다.
조그만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는데
금성상표가 붙어있었지요.
소리는 그 진공관 라디오에 영 미치지 못했고
간혹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소니 트랜지스터보다 못했지만
혼자 듣는 라디오가 생긴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습니다.
플라스틱 머그 잔에 진한 커피를 가득 타 놓고
그때부터 심야프로를 듣고
밤을 새기 시작했지요.

음질이야 쟁쟁거리는 모노 라디오였지만
어두운 밤 , 거기서 나오던 음악은
깜깜한 우주 저편의 아득한 곳에서
보내는 메시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뻔한 감상적인 음악 엽서와
생일 축하 메시지와
지금은 우습기도 한 디제이들의 멘트...
그러나 그렇게 음악을 듣던 시간 속에서
내 정서의 많은 것들이 생겨났겠지요.
어릴 때 있던 야전전축도 망가지고 난후
전축을 살 형편도 음반을 살 여력도 되지 않는 집이어서
라디오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지요.

어떤 사적인 이야기가 끼어있어야
음악이라는 생각이 드는 까닭도
그때의 청취의 습관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스테레오 라디오가 생겼지요.
뭐 아주 조그만 라디오였고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푸가였던가, 그런 이름의
라디오였습니다.
폴더 형식의 스피커를 펼치고
가까이 들으면
오른쪽과 왼쪽의 음이 분리되어 들리던 것이
너무도 신기하던 라디오.
그 라디오로는 주로 하드락들을 들었지요.
매일매일 듣던 곡들의 제목과 밴드 이름들을
적어두곤 했습니다.
Ruch라던가 Triumph,
Black Sabath라던가
Kansns, 10cc...

*

대학에 들어와서는 모노 카세트를 가지고
고전 음악들을 많이 들었는데
그러면서도 라디오 프로를 많이 듣기도 했지요.
KBS FM에서 하던 명곡의 전당은
정말 좋은 음악들을 많이 들려주었지요.
4학년이 되어 턴테이블이 달린 전축을 사게 되었어도
라디오로 여전히 음악을 들었습니다.

*

그러다 직장을 다니면서
라디오를 잘 듣지 않게 되었지요.
음악은 CD를 사서 듣기도 했지만
사실 그리 음악을 많이 듣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다시 라디오와 만나게 된 것은
지금도 여전히 끌고 다니는
중고차를 사게 되면서 였습니다.
동부 간선도로를 달리며 듣던 시속 130Km의 바하.
퇴근 길에 창을 한껏 열고 듣던
Nirvana...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창을 열고
배철수의 음악 캠프를 신나게 들었습니다.

*

직장 생활이 갈수록  버거워지고,
그러면서도 대안 없이 직장에 묶인 채
과도한 일과 출구 이 어두운 세상에 갇혔다는 답답함으로
온 마음이 어두워져 있던 어느 새벽,
새벽길을 달리다가 라디오에서
마태수난곡의 아리아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들었 습니다.
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달리는 길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새벽이라곤 하나 길을 덮은 어둠과
내 마음의 어둠과
온 우주에 가득한 어둠을 뚫고
라디오의 전파가 날아와서
나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

기술이라는 것은
흔한 광고 카피들이 오도해온 것처럼 
직선적으로 진보하지 않습니다.
늘 사람과 삶을 통하여
변용되고 그 길을 바꾸기도 합니다.

아득한 어둠 속에서
먼곳에서 들리는 어떤 이의 음성을 그리워하는
어떤 사람이 있는 한
라디오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홈피의 라디오적 성격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구요.




 

2003.1.16




superstar / carpenters


2003/01/16 00:00 2003/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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