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밤을 새다

from 이야기 2003/01/17 00:00


"작가는 노예로부터 시작했다"
내가 좋아했던 작가의 말입니다.

부질 없이 밤을 새고
괜한 일에 붙들려 밥벌이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던 시절,
그 말은 가끔 위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작가도 아니고
남의 말들을 만들어 주는 직업을 가진 나로서는
그러한 자기 자각이란 것도
가끔은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저 노예일 뿐,
노예로부터 시작한 작가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지금 새벽 한 시, 밤을 샙니다.
여기 직장에서의 마지막 밤샘이
될 것 같습니다.

무수한 야근과 철야,
결국은 버려질 말과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헛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
저의 오랜 생각이었고,
이 일을 접고 떠나는 것이
오랜 희망이었지만,
지금은 저의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생각하면 저의 뜻대로 된 것이
단 하나도 없는 인생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막힌 것 같은 심정으로
살아오기도 했지만,
낼 모레 마흔이 된 지금의 생각은
오히려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정직하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다른 걸음이 시작된다는 것을
조금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은
내 속에 무언가 멋진 것이 있다는 허튼 믿음으로,
내가 좀 더 나은 어디엔가 있어야 한다는
막연한 희망으로
늘 지금과 여기에서 도망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딘가로 향하는 첫걸음,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출발을 하는 것이겠지요.
지금 여기 내가 발디디고 있는 곳이 아니면
모두 죽음이다,라는 절실한 자각이 들때에만
다음 걸음을 위한 움직임이
가능해 지는 것 같습니다.

막연히,
멋진 것이 내 속에 있으리라는 자기 암시를 만들고,
속으로 향해야할 시선을 밖으로 돌리게 만드는
무수한 이미지들...

그런 부유하고 부산한 이미지의
너울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첫 걸음은 시작됩니다.
신체의 나이가 스물이건 마흔이건, 
그때서야 비로소 걸음마를 하는 것이겠지요.

글을 쓰다보니
다시, 그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작가는 노예로부터 시작했다."

나에게 아무런 멋진 것도
타고난 어떤 우월함도 없다는 것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내가 작가가 아니라할지라도 말입니다.

2003.1.17





after midnight / j.j. cale

2003/01/17 00:00 2003/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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