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from 남의 것 2012/04/02 11:53


아주 오랫만에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읽었다.
그 중에서 41장을 옮겨본다.

*

뛰어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힘써 행하려 하고,
어중간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이런가 저런가 망설이고,
못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크게 웃습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에 이르기를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이 보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도는 뒤로 물러가는 것같이 보이고,
평탄한 도는 울퉁불퉁한 것같이 보이고,
제일 가는 덕은 골짜기같이 보이고,
희디힌 것은 더러운 것 같이 보이고,
넓은 덕은 모자라는 것같이 보이고,
굳은 덕은 보잘 것 없는 것같이 보이고,
참된 실재는 변하는 것 같이 보이고,
큰 모퉁이에는 모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더디 이루어지고,
큰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고,
큰 모양에는 형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도는 숨어 있어서 이름도 없는 것,
그러나 도만이 온갖 것을 훌륭히 가꾸고 완성시켜 줍니다.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渝,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善貸且成.


*

스무 살 때의 철학수업,
'도덕경'과 '반야심경'을 읽게 되면서 놀라운 해방감을 느꼈다.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라왔던 기독교의 복음서와
동양의 경전들이 상통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도덕경의 '道'라고 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복잡한 일들에 지친 심정에 꺼낸 책이었다.
오강남 교수가 풀이한 책.
2005년 문득, 읽고 싶어서 샀다가
원문을 옮겨 쓰며 읽다 접어둔 책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한글 풀이만 죽 읽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아주 큰 위로가 되었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조만간 '반야심경(般若心經)'도
읽어야겠다.


 






2012/04/02 11:53 2012/04/02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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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4/07 02:3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오늘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가
    오강남 교수가 쓴 위 '도덕경'과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조금 읽었습니다.

    '예수는 없다'는 아무래도 이 책의 특성상 기독교인을 상대로 하는 말들이 많았고,
    특정 종교인이 아닌 저로서는 그리 큰 관심이 없는 논쟁거리가 길게 다루어져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간 중간 어떤 부분들은 제가 성경을 읽어나가는데
    막연하게 남아있던 저항감을 걷어갈 정도로 아주 좋았습니다.

    도덕경을 비롯 이 분의 해석이나 관점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던데
    저자는 그런 모든 것을 감안하고, 강요하진 않고 그러나 분명히 세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언어는 종종 외국어 같은데
    이 책에서는 나와 같은 말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오랜 역사 속 이런 분들이 존재했다는 것이 든든했습니다.

    • 마분지 2012/04/08 06:09  address  modify / delete

      도덕경 20장을 읽으니
      또 마음에 와닿습니다.

      "...딴 사람 모두 소 잡아 제사 지내는 것처럼 즐거워하고,
      봄철 망두에 오른 것처럼 기뻐하는데,
      나 홀로 멍청하여 무슨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간난아이 같기만 합니다.
      지친 몸이나 돌아갈 곳 없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 여유 있어 보이는데
      나 홀로 빈털터리 같습니다.
      내 마음 바보의 마음인가 흐리멍텅하기만 합니다.
      세상 사람 모두 총명한데 나 홀로 아리송하고,
      세상 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맹맹합니다.
      바다처럼 잠잠하고, 쉬지 않는 바람 같습니다.

      딴 사람 모두 뚜렷한 목적이 있는데
      나 홀로 고집스럽고 촌스럽게 보입니다..."

      수 천년 전의 글인데
      지금을 사는 제 마음을
      옮겨 놓은 것 같습니다.

      *

      경전의 언어는
      언제나 현재의 언어로 새롭게 옮겨져야 하는데
      종교라는 체제에 기대어 사는 이들은
      그것을 가두어 특권화하거나
      신비화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언어라는 것이 한계를 가진 것이지만
      가장 일상적인 언어로 풀이하고
      대화하려는 태도야 말로
      가장 중요한 자세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야 언어로 닿지 않는 부분도
      그 언어의 끝에서 우리가 도약해서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신비는 저 멀리 이상한 곳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또 일어나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언어의 체계 속에
      가두어두는 것이 많죠.
      그러한 종교 언어의 외계어화(外界語化)는
      어떤 진실,혹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라는 체제가 가진 문제일 것입니다.
      비의(秘意)란 아마도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일상의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이어지는 것이지
      '수리수리 마수리'에서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엉뚱한 사다리를 놓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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