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from 이야기 2012/09/07 03:25



다큐에 들어갈 열 여섯번 째 삽화.
아버지의 어린 시절부터 피난 이후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시기엔
사진도 한 장 없고 또 대체할 이미지도 마땅찮아서
고모님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죽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이 마지막이다.

교회에서 기도하던 중에 빛을 보았다던,
어린 시절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그 순간을 나름 그려본 것이다.

막내 고모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6.25 직후 아버지는 김천에 계시는 고모님을 찾아와
아주 놀라운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 하셨다고 한다.
그 꿈의 내용은 다음에 이야기하겠다고 하셨지만
결국 고모님은 그 꿈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고
당연히 나도 전해듣지 못했다.

어떤 기이한 꿈을 꾸는 법도
또 어떤 종교적 이상(異像)을 보는 법도 없는 나는
그 내용이 궁금하지만 알 수가 없다.
결국 아버지를 깊은 기독교 신앙으로 이끌고
신학교까지 가게 했던 그 경험이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어쩌면 마지막 인터뷰로 남겨 놓고 있는
아버지 친구분의 이야기에서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

이 마지막 그림을 그리기 위해
카톨릭에서 중요한 그림인 '수태고지(受胎告知)'를
여러 장 찾아서 보았다.
'수태고지'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와
예수를 임신했다고 알리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어린 아버지가 빛을 보았던 그 순간은
카톨릭의 역사에서 수태고지의 순간처럼
중요한 순간이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다양한 수태고지 그림을 참고 삼아
이런 저런 시도를 했보았다.
마루가 깔린 옛 교회의 창틀과
그 위에 있던 백열전구 등도 넣었고
어두운 창 밖의 나무 그림자도 넣을까 했다.
그러다 많은 것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만을 남겼다.
열 두 살에 부모를 떠나 38선을 넘어
형과 누나 집을 전전하며 살아가던 한 소년이
신을 만나고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던 순간.

*

좌측 상단에 있는 하얀 빛은
오래 전 내가 그렸던 부활절 십자가를 가져온 것이다.
앞의 삽화들에서는 흰색을 쓰지 않았지만
이것은 빛이기도 하고 또 초현실적인 내용이므로
흰색으로 했다.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는 하얀 십자가.
나를 향애 솟아오는 부활의 십자가.
십자가의 모양이기도 하지만
또한 방주(Ark)의 머리 같기도 하다.

*

아버지는 이후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것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한국의 주류 종파에서 배척을 당했던 종파의 신학교를.
하지만 결국 어려운 형편 때문에 졸업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이 없게도 빨리 돌아가셨다.
줄곧 나는 그 인생이 마음 아팠다.

하지만 이 그림을 마치고 다시 생각해 본다.
만약 아버지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한들
이런 기독교계의 현실 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비록 일찍 돌아가셔서
그 생각을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아는 내 아버지는
이런 현실을 용납할 수 없을 것 같다.
한때는 일본제국주의를,
그 다음엔 미국의 패권주의를 신봉하며
그 세력을 불려온 주류교회.

아버지는 돈있는 사람을
장로로 세우려는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고
그해 추석 돌아가셨다.
광주에서 수 많은 사람이 죽고,
여전히 한국교회의 큰 어르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경직 목사가 살인마 전두환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하고,
라디오만 틀면 조용필 노래로 시끄럽고,
내가 좋아하는 사촌형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고,
통행금지가 사라졌으며
컬러TV 방송이 시작되었던 그해.

예루살렘 성전을 보던 예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암탉이 새끼를 품으려는 듯
신이 수 많은 선지자들을 너희들에게 보냈으나
너희들이 다 죽였다고.
이제 너희들의 자랑인 예루살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허물어지리라고.

*

어떤 소년의 소박한 기도는
때로 놀라운 역사를 만든다.
소년 박수근은 밀레의 화집을 보고
밀레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고
그만큼 위대한 작품들을 남겼다.
아마 아버지도 그런 아이같은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떤 기도를 했으며
무엇을 남겼을까?

어쩌면 그 무엇은 
내게 남겨진 숙제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야 말로 가난을 남기고 간 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산일지도
모르겠다.















2012/09/07 03:25 2012/09/07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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