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체육회

from 나날 2012/10/15 02:16


처음으로 효창 운동장을 찾았다.
이북 오도민 체육대회(以北五道民體育大會).

작업의 마무리를 위한 중요한 인터뷰가
기약 없이 펑크나는 바람에 멍하기도 하고
또 사무실의 상황이 좋지 않아
답답하기도 한 날들이었는데,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의 샷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

운동장 출입구에서부터
'종북좌파 척결' '망국적 6.15 폐기' 등의
플랭카드가 보인다.
운동장을 들어서자 스탠드는
함경도 황해도 평안도 등으로 구획이 나누어져 있고
그 안에 군 단위로 팻말이 붙어있다.

반갑습니다, 아리랑 등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운동장.
무예 시범이 있은 후 도별 선수단이 입장한다.
어떤 이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행진 하기도 한다.
탈북자 선수단도 별도로
입장한다.

행사가 진행 되던 중
세 명의 대선 후보가 방문 한다.
800만 실향민은 그들에게 커다란 표밭이니
당연한 걸음일 것이다.
안철수씨가 지나가자 작은 박수 소리가 나고
그 뒤로 대거리를 하며 따라가는 사람이 있다.
문재인씨는 스탠드로 올라와 악수를 나누곤 하는데
흔쾌히 손을 잡는 이들도 많지만
오지마,라고 외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 아래 운동장 쪽에서는
햇볕정책 폐기하라, 6.15 망령 사라져라,등이 씌어진
피켓들을 든 십 수 명의 사람이
문재인씨의 걸음으로 따라 오며 시위를 하고 있다.
이어서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박근혜씨가 등장하자
좀 더 큰 박수소리가 나고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도 들린다.

*

실향민들 중에는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큰 걸음을 남겼던 분들도 있었지만
전체로 보아 실향민 집단은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일 것이다.
그 누구보다 통일을 원하면서도
분단이라는 갈등 상황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해온 독재자들과 수구세력에게
큰 지지를 보내왔다.
오랫동안 그들은  
북한 체제의 성립과 분단의 과정에서 생긴
실향민들의 트라우마를
정권 유지를 위해 이용해왔고
지금은 여권의 대선 승리를 위한
종북 논리에 이용하고 있다.
휴전을 기점으로 삼아도 60년.
실향민 1세대는 젊어도 80 언저리의 나이.
이제 수많은 실향민에게
살아 생전의 통일은
체념할 무엇이 되어버렸다.

운동장에는 2,3세는 물론
4세까지 함께한 가족들도 보였지만
남자 어르신 혼자 찾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1년에 한 번 있는 의미 있는 행사라 여겨
깔끔하게 차려입고 오신 분들도 보였지만
허름한 옷을 입으신 분들이 더 많았다.
주름 진 얼굴과 힘 없는 걸음.
'혈혈단신 38선을 넘었다'라는 말이
무슨 관용구처럼 쓰이기도 했으니
남한에 내려와 결혼을 하셨더라도
이런 행사에는 혼자이신 경우가 많은 것이다.
통일이라는 커다란 희망은 제쳐두더라도
고향 한 번 가고 싶다는,
아니 부모 형제 생사나 알고 싶다는
그 마음 마저 배반 당하고 살아온 60년.
어르신들의 힘 없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고 많이 슬펐다.
고향과 형제를 잃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정치적 자존마저 훼손당한 사람들.

아버지의 고향인
'龍川郡' 팻말이 있는 곳으로 가서
어르신들의 모습을 잠시 촬영하고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 아버지와 같은 학교를 다녔거나
또 어쩌면 안면이 있을지도 모를
분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그 속에 자리 잡고 앉지도 못하면서
많은 시간을 그 언저리에 머물렀다.

운동장 문을 나서는 길.
구부정하고 엉성한 걸음으로
내리막을 걸어가는 어르신들의
뒷 모습을 오래오래 보았다.

*

2009년 통계에 의하면
이산 가족 상봉 희망자는 총 128,747 명.
그 중에서 겨우 1,800명 만이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났고
51,744명은 상봉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77,125명 중 80세 이상의
고령자가 35,158명으로
이산 가족 1세대의 상봉 및 생사 확인은
점점 가망 없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

어르신 한 분이
점심 식사 후 여분의 도시락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
들고가시던, 그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2012/10/15 02:16 2012/10/15 02:16
Tag // , ,

Trackback Address >> http://lowangle.net/blog/trackback/658

댓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