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다리 이야기

from 영도 影島 2013/07/01 00:00



지난 1월 우연히,
영도 다리 부근의 역사를 담은 조형 작품을 만든다는
작가를 만나게 되어 쓰게 된 글.

조형 작품과 함께 제시되는 글이란
대체로 조형 작품에 대한 설명이거나
표현한 장소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일반적일텐데
그것보다 거기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 싶어
시대를 달리한 상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짧은 소설 형식의 글로 써보았다.


*


1

도선(渡船)

1978년, 영도 주부 양을선

 

 

그때 어머니 마음,

지금 내 마음이었겠지



결국 500원을 깎아서 옥돔을 산다. 제주 사람 제사상에는 옥돔이 있어야 한다. 원래도 발 디딜 틈 없는 자갈치 시장인데 추석을 앞둔 지금은 걷기조차 힘들다. 딸아이가 지쳤는지 뾰로퉁한 표정을 지어 결국 모퉁이 가게에서 국수를 먹기로 한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자갈치 시장으로 건너오면 어머니는 꼭 국수를 사주셨다. 지금 내 곁에서 후후 불어가며 국수를 먹고 있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니, 그때 정신없이 국수를 먹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보고 지긋이 웃던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제주도 분이셨다. 단발령으로 갓을 만들던 생업이 끊기고 이재수의 난 이후 섬이 뒤숭숭할 때, 절영도로 건너오셨다고 했다. 그 후로 할아버지는 고깃배를 타셨고 할머니는 해녀로 일하시면서 아이들을 낳고 기르셨다. 막내딸이던 내 어머니는 6.25가 터지던 해 가을, 나를 낳으셨다.

파도에 흔들리는 도선 선착장. 아이는 그 흔들림이 재미있는지 팔을 벌리고 몸을 흔들며 웃는다. 할머니는 당신이 물질해서 캐낸 멍게와 해삼 등을 도선에 싣고 건너와 여기저기 팔러 다니셨을 것이다.

도선이 선착장을 떠나자 나는 습관처럼 왼쪽을 본다. 저만치 제주로 가는 여객선이 보인다. 아, 다음에는 아이를 데리고 저 배를 타야겠다. 할머니는 제주행 여객선을 보시고 얼마나 고향이 그리우셨을까?

대평동 매표소를 나오자 문을 닫은 공장들이 보인다. 명절을 앞둔 지금, 분주하고 시끄럽던 거리는 고요하다. 가끔 배와 배가 부딪혀 삐걱 거리는 소리, 간간이 갈매기 울음이 들릴 뿐. 그래, 어머니는 저 뒤편 조선소에서 망치로 배의 녹을 떨어내는 '깡깡이'를 하셨지. 쇳녹을 뒤집어쓰고. 배에 매달려 망치질 하던 어머니 생각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아 딸아이의 손을 꽉 잡는다.

 

 

2

영도다리

1963년, 부산고등학교 2학년 홍은식




영도다리 위에서

처음 보았다

무뚝뚝한 아버지의

눈물

 

어머니 생신이 되면 아버지는 영도다리로 가신다.
남북이 38선으로 갈린 후 아버지는 먼저 월남하셨고, 우리 형제들은 1.4 후퇴 때 큰집 식구들과 함께 월남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프신 할머니를 돌보시기 위해 북에 남으셨던 것이다. '아버지께 꼭 말씀 전하거라.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알았지?'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 10년. 어머니는 북쪽에 묶이신 것이었다. 하지만 올해도 아버지는 어김없이 영도다리를 찾으신다. 

건어물 냄새가 가득한 거리를 지나 한약재 가게 쪽으로 올라서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영도다리.
윙, 끼이익 하는 육중한 소리가 나자 푸드득, 갈매기 몇 마리가 날아오르고 영도다리가 하늘로 치솟기 시작한다. 다섯 살이었던가?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땅이 기울어지는 것 같은 어지럼증을 느꼈고, 다리 위에서는 난간 사이로 어른거리는 검푸른 물이 무서워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꽉 붙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오르내리는 다리를 말없이 보고 계신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오늘 따라 유난히 어깨가 좁아 보인다.

내가 열 살 때 쯤, 아버지는 영도다리 옆의 점집에서 검은 안경을 쓴 점쟁이에게 점을 본 적이 있다. '넘어왔겠소? 아니겠소? 그래, 언제쯤 만나겠소?' 점쟁이는 어머니가 38선을 넘어왔을지 확실치 않지만 만날 날은 멀지 않다고 했다. '순 거짓말!' 점집을 나온 아버지는 한마디를 뱉으시고는 굳은 표정이셨다.

아버지와 함께 다리 한가운데로 걸어간다. 천마산으로 떨어지는 해가 바다를 비추어 남항은 온통 금 비늘 같은 물결로 가득했다. 그 사이로 통통선이 지나며 검은 길을 만들었다. 그 광경에 한참 빠져있다 고개를 돌려 아버지 얼굴을 보았을 때,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처음이었다. 아버지의 눈물을 본 것은.

 

 

3

부산 시청 자리

2013년 소설가 김윤호

 

보내지 못하는 편지

 


25년 만에 부산엘 왔다네.

내 나이 이미 아흔에 가까우니 아마 이게 마지막 부산 방문이 되지 않을까?

피난시절, 우리가 들르던 밀다원(蜜茶園), 금강다방 자리를 더듬으며 광복동을 걸었네. 그렇게 걸어 나오면 옛 부산시청. 아, 그런데 그 자리엔 백화점이 세워져 있었네. 옛 모습을 기대하던 내게 현대식 백화점 건물은 마치 우리의 시대가 영영 가버렸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네.

그대를 처음 만난 것은 1951년, 부산 시청 옆의 국군병원. 일제시대엔 미나카이 백화점 건물이었다지. 전선에서 큰 부상을 입은 자네를 종군기자였던 내가 취재하러 갔었어. 그 만남 이후로 우리는 문학을 한다는 열정으로 하나 되어 부산의 밤거리를 쏘다녔지. 휴전이 되고 나는 서울로 돌아갔지만 자넨 통일이 될 때까지는 부산 사람으로 살겠다고 했지.

전망대로 올라갔어.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네. 거리를 내려다보니 마치 우리의 옛날을 내려다보는 기분이었어. 그대와 함께 앉아 오르내리던 영도다리를 보던 곳, 옛 부산역이 있던 자리, 또 자네의 직장이던 방송국이 있던 언저리, 그리고 자네와 마지막 만났던 옛 세관 터.

그래, 그날을 기억하네. 몇 해 만에 만난 우리는 술을 많이 마셨고 결국 통행금지 시간을 넘겨 술집에서 밤을 새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때 그대가 말했어. 틈틈이 소설을 쓰고 있다고. 탈고하면 내게 보여주겠다고. 하지만 그 소설은 결국 완성되지 못했어. 그 전에 그대는 저 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지.

밤을 새운 그 아침, 그대의 얼굴을 기억하네. 직장으로 간다고 웃으며 멀어지던 얼굴, 그 위의 햇살. 그것은 한 장의 스냅사진처럼 내 깊은 곳에 각인이 되어 있어.

내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을까? 이제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 소설이라는 생각으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실향민의 이야기를 쓰려고 해. 그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또 나의 이야기이지. 그리고 그건 자네가 마무리 하지 못한 이야기일거야.

친구, 높은 하늘에서 나를 굽어보며 격려해주게.


2013년 3월 21일 벗 윤호

 

 

4.

절영도(絶影島)

1937년, 부산부청 직원 박원식
 

 

빼앗긴 산 꼭대기에

제비꽃이 피었네

 

부산부(釜山府) 토지과 직원들의 봄맞이 등산. 절영도의 봉래산을 올랐다. 두 시간 동안 땀 흘린 끝에 마지막 바위를 오르자 갑자기 사방이 넓어졌다. 시원한 바람에 땀을 씻으며 둘러보니 한쪽으론 아득한 수평선이 펼쳐졌고 반대편으론 새로운 시가지와 영도다리가 보였다. 기세 좋은 햇빛 아래 모든 것이 반짝이고 있었다.

스즈키(鈴木) 과장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대일본제국이 만든 부산부를 제대로 보려면 역시 이곳이란 말이야!' 언제나 대일본제국을 들먹이는 것으로 시작하는 그의 말이 듣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바위틈에 제비꽃이 보였다. 보랏빛 가녀린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은 까마득한 세월을 불어왔을 것이다. 조선이나 일본이 생기기 전에도, 하리(下里)의 패총에 사람이 살기 전에도...

갑자기 스즈키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이, 빠꾸(朴)상, 자네는 이 돌이 뭔지 아나?' 그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대삼각점(大三角點)'이었다. 1910년, 이곳을 기점으로 일본인들은 조선 땅을 측량했고 지도를 만들었다. '철도며 도시, 공장 등 조선이 입은 대일본제국의 혜택이 이 작은 점에서 시작되었단 말이지. 하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토지를 측량해서 임야나 넓은 땅들을 거저먹고 조선 농민들을 가난한 소작인들로 내몰았죠.' 순간 정적이 흘렀고 스즈키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속을 터놓고 지내는 야나기(柳)상이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야나기를 먼저 보내고 혼자 앉은 술집. 북으로 갈까, 남으로 갈까 고민이라는 나의 말에 그는 북쪽은 어디고 남쪽은 또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우연히 접한 조선 민속놀이에 반해 현해탄을 건너온 조선의 문화에 깊은 애정을 지닌 친구였다. 오늘은 그에게도 속을 터놓지 못했다. 남쪽은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것이고, 북쪽은 독립운동 하는 선배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마지막 잔을 비우며 나는 중얼 거렸다. '북으로 갈지, 남으로 갈지 고민이란 말일세...' 마지막 전차가 지나가는지 술집 유리창이 바르르 떨렸다.

 

 

5

대풍포(待風浦)

1918년 다나카 조선소 이응칠

 

이 어두운 바다는

저 큰 세상을 향해

 

조마조마했다. 처음으로 제작에 참여한 목선(木船)의 진수식. 바다까지 미끄러져 내려간 배는 흰 거품을 튀기며 물 위로 떠올랐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누군가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지난 석 달간의 고초가 씻은 듯 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터지던 일본인 기술자 기타자와의 쟁쟁거리던 목소리도 귓가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직원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대풍포(待風浦)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생기기 시작한 공장들을 지나자 바다였고, 배들이 물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저기 남항 쪽의 불빛이 어른 거렸다.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았다. 내 손으로 다듬은 배가 진수한 날 웬 눈물이란 말인가?

합방이 되던 해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통영에서 배를 만들던 분이셨는데 어린 내게 간간히 말씀하시곤 했다. 임진왜란의 해전에 대해, 일본의 군선이 결코 능가할 수 없었던 판옥선과 거북선에 대해. 그 때 내 가슴은 얼마나 뛰었던가? 어쩌면 내가 '다나카 조선소'에 입사한 것도 할아버지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갈매기 한 마리가 어두운 바다 위를 스치듯 날아갔다. 근대적인 조선 기술을 익히는 것은 늦었지만 일본인들 보다 더 나은 배를 만들겠다는 것이 내 결심이었다. 솟구친 갈매기가 끼룩 거리며 스탠더드 오일의 기름 탱크 쪽으로 날아갔다. 얼마 전 현명건이 라는 청년이 유조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는 바다 건너 큰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 생각에 이르는 순간 마음이 트여왔다. 지금 공장이 들어서고 있는 이곳 대풍포는 임진왜란 때 사츠마번(薩摩藩)의 군선들이 정박했던 곳이었고 임시 왜관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오랜 옛날부터 수많은 배들이 풍랑과 바람을 피하며 더 큰 바다를 꿈꾸던 곳이다. 그렇다. 내게는 지금껏 조선이 꿈꾸지 못했던 바다, 일본이 열어가는 것 보다 더 큰 바다를 향한 꿈이 있지 않은가?

어느새 술기운은 가셨고 밤하늘 위로 까마득히 솟아오르는 갈매기가 보였다.


 


6

절영마(絶影馬)

1884년, 절영진 군졸 김덕만

 

 

아득한 땅 끝까지

나를 태우고

 

5년 전, 삼랑진 뱃머리를 떠나올 때 아내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쳤다. 웬 눈물이냐고 호통을 쳤지만 강물 따라 흘러 내려오자 내 마음도 눅눅해졌다. 고향을 떠나 낯선 바닷가로 군역을 떠나는 길이었다. 부산진이라면 괜찮을텐데 말이나 기르는 섬인 절영진(絶影鎭)이라니.

그런데 절영진에 온지 한 달도 못되어 이곳이 너무도 좋아졌다. 울창한 숲 그늘의 서늘함과 툭 트인 수평선은 신선의 세상 같았다. 가끔씩 만나는 어부들은 온갖 물고기와 해산물을 건네주었고 벌목꾼들에게서도 생기는 수입도 쏠쏠해서 이런 군역이라면 평생 할 것 같았다.

첨사 임익준(任翊準)은 우리에게 말했다. 이곳은 예로부터 대마도인들과 왜구들이 넘어오는 곳이므로 잘 지켜야 한다고. 그리고 세상이 달라지고 있으니 연기를 내뿜는 커다란 배[異樣船]를 보면 반드시 보고를 하라고.

내가 맡은 중요한 업무는 산등성이에 풀어놓은 말들을 하루 한 번씩 감지(甘池)에 데려가 물을 먹이는 것이었다. 오랜 옛날부터 이곳은 말을 기르는 섬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기른 말들은 신라에도 진상되었고 고려의 태초 왕건에게 선물로 보내지기도 했다고 한다. 첨사는 말했다. 이곳이 왜 절영도(絶影島)인줄 아느냐고.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들이 빨리 달려서 절영(絶影)이라고. 그림자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빠른 말. 나는 그 말들과 어울려 다섯해를 보냈다. 그리고 내일 이 섬을 떠난다.

동료들이 주는 술잔을 마다 않고 다 받았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내와 이제는 많이 컸을 아들 칠수를 생각하면 좋은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을 떠나는 것이 싫은 것이다. 첨사가 준 선물도, 조내기 고구마가 든 보퉁이도 챙겼으니 이제 잠들어 새벽에 초량으로 가는 배를 타야 하는데.

후두득,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숲의 나뭇가지를 흔들며 바람이 달려왔고 파도 소리가 커졌다. 그러자 이제 이별이구나 싶었다. 거세게 떨어지는 빗소리가 수많은 말이 달음박질하는 발굽 소리 같았다.

절영도의 말들이 달리고 있었다. 섬을 나와 강을 건너고 벌판을 가로질러 저 아득한 만주 벌판, 고구려와 고조선의 땅을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 말 중 가장 날쌘 놈을 잡아 타고 까마득한 세상 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7

전차

1959년, 영도 국민학교 교사 김인수

 

항구는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교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이파리에 가을 빛이 머물고 있다. 운동장엔 아이들이 몇몇 뛰어 놀고, 주번 학생이 가져온 학급일지를 확인하고서 학교를 나선다. 남포동 가는 버스가 많아졌지만 그녀를 만나는 길엔 전차를 타고 싶어진다.

두 해 전 이맘 때였다. 남항동 전차 종점에서 한 여인이 신선동 2가를 어떻게 찾아 가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대략의 길을 가르쳐주었다. 이상하게도 그후로 그녀의 고운 얼굴과 강단 있는 목소리가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한 달 후 퇴근길, 우연히 다시 만나 함께 전차를 타게 되었던 것이다. 전차가 영도다리를 건널 때 그녀는 불쑥 말을 꺼냈다.

'일본인들이 만든 다리 위로 일본인들이 놓은 전차를 타고 건너가는 것, 참 기분이 묘하군요.' 나는 무언가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저 영도다리 위에서 보는 멋진 풍경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생각은 깊었던 것이다.

전철을 내린 후 나의 청에 따라 우리는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광복동의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에 그녀가 영도를 찾은 이유는 안중근의사의 여동생께서 영도에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나뵙기 위해서였고, 오늘은 그 분이 이미 돌아가셨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일제시대에 만주로 떠나신 후 돌아오지 못하셨다는 작은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전차는 이내 남항동 4거리를 돌아 영도다리에 오른다. 부산항은 오렌지 빛 저녁 햇살에 잠겨있다. 작은 배들이 통통 거리는 소리를 내며 항구를 오가고 있다.

오늘 그녀를 만나면 부산극장에서 영화를 보자고 할 것이다. 그후에는 몇 달 전부터 준비해 둔 반지를 꺼내어 청혼할 생각이다. 그런데 오늘은 과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지난 번처럼 반지를 그냥 가방에 넣어둔 채 집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댕댕댕댕, 남포동이 가까워지고 있다.

 

 

*


작품이 전시된 곳을 가보지는 못했는데
인터넷의 기사를 보니 이런 식으로 전시 된 것 같다.



사진 중에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사람이
작품을 만든 허병찬 작가인 것 같다.

작품의 구상부터 참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정해진 장소에 대해 써야했고
또 텍스트의 제시 방식에 대해
내 의견이 반영될 수 없어  조금 아쉽지만,
관공서가 주관하는 일에서
이런 이질적인 형태의 글을 함께 전시하는 것이
관철되었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아무리 줄였다 해도 제법 긴 글이기도하고...
작가가 담담자와 많이 싸워서
글을 쓴 내 이름도 넣기로 했다고 한다.
(관공서에서 주관하는 일이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도 어렵고
상식적인 일들이 너무도 쉽게
무시되곤 한다.)


*

그런데 전시된 장소하 하필이면
영도 경찰서 담장이라니...
영도다리 재개통과 관련해서 하는
행사의 일환이니 만큼 그 장소가 적당할 것 같긴 한데,
영도 경찰서라면, 김진숙씨의 체포영장을 청구하고
송경동 시인이 구금되었던 곳이 아닌가?
나는 한진 중공업 담장이 더 좋은데...
심지어 부산일보에는
영도경찰서 담장이 갤러리형 담장으로 변신했다는
아주 한심한 관제 PR기사를 싣고 있다.

소설 투의 글이지만
장소에 대한 정보도 담아야 하니까
조금 어정쩡해 보이기도 하고,
짧게 줄였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도 있다.
그리고 불특정의 시민에게 공개 될 것이므로
내 생각들과는 관점이 다른 내용도 있어서
글 모두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연히 작품을 보고 글을 읽게 될 사람들이
영도 다리 부근의 공간을
역사 속에서 부대끼고 싸우고 살아갔던 이들의
숨결이 스민 곳으로 느꼈으면 좋겠다.


*

제대로 인터뷰도 하지 않고 쓴 기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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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1 00:00 2013/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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