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통해

from 나날 2015/06/02 17:58


카메라를 들고 따가운 햇볕 속을 걷거나
바닷가의 바스라져가는 바위와 대면하거나
아니면 정신 없이 흔들어대는 바람 속에 있을 때,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오직 하나의 시간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애써 먼 길을 찾아와 카메라를 열고
무언가를 담고 있는 나의 행위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회의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 하나의 시간 속에는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 것 모두 구분이 없고
애써 표현하고 주장할 무엇도 없다.
그 하나의 시간, 영원한 침묵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속에는 모든 말과 꿈들이
침묵의 형태로 깃들어 있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카메라를 들고 걸어갈 것이다.
그러다 여전히 햇볕 속이거나 바람 속에서
그 하나의 시간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말할 필요도 없는
그 영원한 침묵 속으로.

그러나 내게 가야 할 길이 조금 더 남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가지만은 기억해야 겠다.
최대한, 침묵 속에서 걸러내지 않은 말들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겠다는 것.


*

<사막의 지혜>를 엮었던
토마스 머튼의 기도 중 한 부분을 옮겨 본다.

나의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눈에 보이는 보상을 믿지 않게 하소서.
나의 희망은 사람의 가슴으로 느낄 수 없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내 가슴의 느낌을 믿지 않게 하소서.
나의 희망은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것에 있습니다.
내 손가락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을 믿지 않게 하소서.
죽음이 나로 하여금 잡은 것을 놓게 하고
그리하여 나의 헛된 희망은 사라질 것입니다.

 
*

문득,
영화란 것이 사물의 표면만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이다 싶다.
그 너머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2015/06/02 17:58 2015/06/0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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