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영도(影島)에 패총전시관이 있다.
그곳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넘나들며 살았던 이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유물 중에는 지금의 일본 땅인 큐슈지역에서 가져온
무기의 재료 '흑요석'도 전시되어 있다.
그곳에 처음 방문했을 때 신석기인들의 삶을 상상하면서
갑자기 세상이 넓어진 기분이었다.
국가라는 것도 민족이라는 것도 넘어선
어떤 큰 삶의 흔적들을 만났던 것이었다.
그 당시의 바다는 나라를 가르는 벽이 아니라
바다 양쪽의 사람들을 이어주는 길이며
삶을 나누는 마당 같은 것이었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상선(商船)은 다리(橋)의 연장이고
군함(軍艦)은 물에 떠 있는 성채(城砦)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바다의 이미지는
지리상의 발견에 이은 제국주의자들의 시각으로 만들어졌다.
남의 땅을 침략하고 정복하는 이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바다에서 거리를 측정하는 단위인 '해리(海里)'는
함선에서 발사하는 포탄(砲彈)이 닿는 거리를 말하는 것으로
무력으로 다른 땅을 정복하려던 서구의 측정 방식이고
요즘 듣게 되는 '배타적 경제수역(EEZ)'같은 단어는
땅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국가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이 또한 땅을 중심으로 하는 영역 설정이다.

하지만 바다 속의 물고기들은
인간의 그러한 측정방식에는 아랑곳 없이
그저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고 있을 뿐이다.
마치 한반도의 물새들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을 자유롭게 오가는 것처럼.



바다를 육지에 딸린 영역으로 보지 않고
삶의 가운데에 놓고 이야기를 펼쳐가는 책이 있다.
<한일 피시로드>라는 책이다.
'흥남에서 교토까지'라는 부제가 붙었다.
이 책의 일본어 원제는 <ハモの旅・メンタイの夢>,
번역하면 '갯장어의 여행, 명태의 꿈'이다.
그리고 부제는 '한일 물고기 교류사(日韓さかな交流史)'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를 중심으로
수산교류의 현실은 물론
그 역사까지 깊이 탐색하고 있다.

우선, 이 책은 재미있다.
현장과 사람, 역사적 사실과 자료, 통계들을
종횡무진 오가면서 자유롭게 써내려간 이 책은
재미있게 읽히기 때문에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우선,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주 만나게 되는 물고기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의 식탁에 오게 되는지
그 길을 추적을 하고 있다.
홋카이도에서 가리비를 실은 트럭이
시모노세키까지 와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고
다시 거기서 넙치를 싣고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부산의 명물인 자갈치 꼼장어의 기원도 추적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부터 피난시절을 거치며
먹장어(꼼장어)구이가 어떻게 부산을 대표하는
먹거리가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한국인의 삶에 깊숙히 얽혀있는 명태에 관한 장에서는
명태의 신앙적 의미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재래적인 어업 방식과
산업적으로 뛰어들었던 일본업자들과의 경쟁 관계 속에서
자본을 추구하는 어업이 명태 어장을 황폐화시킨 과거도 돌아보고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저자는
어업과 관련한 식민지 청산의 문제에도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해방 후, 한국의 어류학자 정문기씨가
일제 강점기 조선 어류 연구에 몰입했던
우치다 게이타로(內田惠太郞)의 연구 업적을
자신의 것으로 발표한 사실이 있다.
그런데 저자의 비판은 그런 단순한 사실에 머물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에 명태 어종의 보호를 주장했던 정문기가
해방 후 한국에서 정부 요직에 있으면서
어업발전을 통한 경제성장이라는
어업 개발 정책을 적극 주도했음을 비판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우치다 게이타로의 뛰어난 연구가
과학의 객관성이라는 미명 아래
철저히 물고기 연구에만 몰입한 채
조선인들의 바다에 얽힌 삶들은 배제한 사실을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소위 과학의 객관성이라는 것이 놓치고 있는,
그리고 경제 성장과 개발에 의해 훼손되고야 마는
바다가 지닌 더 깊은 의미를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일본도 바다를 어떤 자원으로 보았을 뿐
삶의 중심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현장으로서의 바다.
한국과 일본은 식민지 시기와 경제 개발을 거치며
그러한 바다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경지의 가능성을
2004년 발간된 <유리 판에 갇힌 물고기>라는 책에서
희망적으로 찾아보고 있다.
유실된줄 알았던 우치다 게이타로의 건판 사진을
한국의 젊은 학자들이 발견하여 정리해서 책을 발간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 물고기들은
다시 살아나 바닷속을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유리판에 '갇혀'있다.

일본 여름의 보양식인 갯장어 중에서도 상품은
한국 남해에서 잡혀 해협을 건너 간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남해의 어민들은
활어를 배에 싣고 옮기는 방법을 개발해서
오사카, 고베 등지에 가서 팔았다.
지금은 페리를 타고 일본의 활어차에 실린 생선들이 오가고 있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물고기의 교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활발하고 역사도 깊다.
그러나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국가와 민족이라는, 지극히 짧은 기간동안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 단어들을 제하고 생각해보면
아득한 옛날 신석기인들이
작은 나무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넘나들던 그 시절부터
바다는 이렇게 서로의 삶이 얽히는
삶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의 사람들에게 바다는
'변방'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사고방식의 역사적인 이유는 존재한다.
위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허리 잘린 반도,
그리고 오래 전부터 전해 온 기마 민족의 정착 신화까지
한국 사회의 많은 것들이사람들의 마음을 북으로,
더 깊은 땅으로 향하게 만든다.
그러나 한국인의 깊은 관념 속에는
드넓은 바다가 엄연히 존재한다.
김시습의 <금오신화>에서만 보더라도
'봉도(蓬島)'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득히 먼 바다에 있는 섬을 말한다.
그리고 '부상(扶桑)'이라는 단어는
해뜨는 동쪽 바닷속의 신성한 나무를 일컫는다.
그리고 <홍길동전>의 '율도국(栗島國)'은
저 먼 바다에 있는 이상향이다.
비록 많이 흐려졌지만,
바다 속에서 어떤 대안을 찾던 마음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저자는 <한일 피시로드>를 통해
서구의 커다란 힘들이 갈라놓은 땅과는 대별되는,
인간의 삶이 만나고 나누어지는
보편적인 장소로서의 바다를 꿈꾸고 있다.
저자는 바닷가에 가면 몇 시간이고
바다를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
국가도 인종도 민족도 구별하지 않는,
해리로도 배타적 경제수역으로서도 나눌 수 없는 바다.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오가는 또 하나의 세상.
저자가 이책을 통해 열어주고 싶었던 것은
그러한 바다였을 것이다.

이 책은 한국의 일반인들이 좀처럼 듣지 못했던
재미있는 이야기들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한일간의 근현대사의 굴곡을 넘어서기 위한
저자의 진지한 생각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일반적인 한국인으로서는
좀처럼 가지기 힘들었던
바다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는,
자신의 의식의 중심을 다시 설정해보는
새로운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어릴 적 사회과부도를 펼쳐놓고
한국과 일본 사이의 동해를 보았을 때
커다란 호수 같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이쪽 편에 내가 쪼그려 앉아있다면
누군가는 건너편에서 이쪽을 향하고
마주 앉아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랬는데 몇 해 전 동삼동의 패총전시관에서
지금의 국가나 민족의 개념을 넘어선,
바다를 가운데 두고 이루어졌던 삶의 공동체가
이미 존재했음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일본의 대지진과 해일로 인한 재앙과
그 후로 이어진 아베 정권의
한국에 대한 적대적 태도가 없었다면
이 책은 더 많은 한국인들이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대한
좀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일본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경색 되어버린 한일 관계와 방사능 오염으로
이책이 읽히고 나눠질 길도 좁아져 버렸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재의 한일 관계를 넘어선
더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인류가 더불어 삶을 열어갈
보편적 공간으로서의 바다를 꿈꾸고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온갖 공해와 방사능에 오염되어 가면서도
끊임 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바다의 소리를 더 깊이
새겨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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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3 20:16 2016/02/2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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