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

from 나날 2016/05/13 02:08


다른 이파리들이 맹렬히 초록으로 짙어져갈 때 느닺없이 시드는
이파리들도 있다. 일찍 나는 것은 일찍 지고 늦게 나는 것은 늦게
져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길 가의 이파리들 쯤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면 마음이 무거워 진다.

삶이란 대체로 덧 없는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일찍 시든 사람들,
특히나 사회적인 존재감이 없어 이름 조차 기억되지도 않을 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릿해진다. 누구나 그런 사람 한 두 명 쯤은
마음에 남아있겠지만 나는 유독 그런 경향이 심한 편이다. 이미
이 세상을 떠나버려 소식을 전해들을 수도 없고 다시 만날 가망도
전혀 없는 작은 사람들. 그들은 내 마음의 한켠에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눈빛으로, 어쩌면 수 만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말을 담은
눈길로 나를 보곤 하는 것이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관한 긴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나서 나의
마음에 어떤 평온함이 찾아왔다. 하지만 어이 없이 세상을 떠나버린
작은 존재들이 던지는 그 눈빛은 흐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상태는 그리 좋지 않은 것이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나의
중요한 것들이 놓여있다고 느낀다. 어쩌면 나 스스로 살아가는
일이 버거워서 현실의 존재가 아닌 저편의 존재들에게 말을 걸고
또 어쩌면 그들에게 삶의 이면에 대해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입을 여는 법이 없다.
다행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작업을 진행했다. 앞으로의 작업에서도 그런 마음은 계속
이어지겠지만 이제는 조금 더 들어가야 한다고 느낀다. 기억 속에서
겨우 존재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으므로 그들의 뒤편, 아직은
내게 어둠으로 존재하며 그 눈길 조차 느끼기 어려운, 가까스로
어떤 기색으로 존재하는 이들도 내 작업이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기록되지 않은 진실은 기억을 통해서라도
밝혀볼 수 있겠다만 기억조차 되지 않는 진실은 도대체 어떻게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이전의 작업에서처럼 나는 반쯤
실패할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의 실패. 어쩌면 중단. 그도 아니라면
나는 내 형편으로는 쉽지 않을 픽션의 방식을 시도해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그 너머를 보는 기회를 열어준다. 이미지는
그 자체로도 큰 힘을 가질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미지 너머의
세상을 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십자가이거나 불상이거나
그것을 보며 복을 비는 행위를 넘어서는 것이 바른 신앙이 아닐까.
그 너머의 것을 바라고 나아가는 것이 바른 삶이 아닐까. 그러므로
지금은 암흑같은 그 곳을 향해 눈을 열고 걸어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조금씩 눈이 열릴 것인가? 아니면 어둠 속에서 나는 길을
잃을 것인가? 잘 모르겠다.

다만 걸어가자.











2016/05/13 02:08 2016/05/13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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