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직도 삼국지를 읽지 못하였습니다.

먼저 밝히자면,
이 글이 삼국지를 폄하하거나
삼국지를 읽으신 분들을 싸잡아
획일화하는 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유래한 편견일지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하여간,
중학교 때였습니다.
속옷 검사로 치를 떨게하던 교사는
아이들 중에 똘똘한 녀석들을 뽑아서
지도위원인가 뭔가 하는 자리에 앉혔습니다.
녀석들이 하는 일이란,
자습시간에 아이들이
조용히 공부하도록 지도하는 것이었지요.
뭐, 거기까지는 흔한 풍경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에게
같은 학급의 아이들을
체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던 것입니다.
체벌이 만연한 시절의 학교였으니
그럴법도 한 일이겠지만,
동급생, 그것도 같은 급우가
때리고 맞는 다는 것은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급우에게 맞는 급우를 보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늘상 뒤줄에 앉아있었지만
그래도 할말하고 공부도 나쁘지 않게 했던 저는
물론 그 지도위원들과 교유가 있었지요.
그 중에 웅변을 잘하고
커서 정치인이 되고 싶어하던 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녀석은 삼국지를
아주 감명깊게 읽었다는 것이었고
그 속에 정치와 인생에 대한...
(중학교 2학년의 말이었습니다)
놀라운 가르침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와 인생에 대한 놀라운 가르침.
그 때 그 아이에게 그것은
현실적으로 급우를 체벌하는 그릇된 권위와
이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치, 남보다 앞서고 우위에 있음을 이용하는 것.
인생, 남보다 잘 알고 많이 알아 더 크게 되는 것.
그 녀석은 그러한 통속의 등식을
삼국지에서 배우고,
학급에서 그릇되게 경험해 나간 것은 아닌지...

그 이후로 많은 정치인들이
뻔한 행보를 하면서 삼국지에서 나온
한자 성어들을 뇌까리는 것을 보면서
가득이나 삼국지와는 먼 마음이
더욱 멀어져 버렸습니다.

어릴 때 일본 만화의 번안으로 조금,
그리고 고우영의 만화로 조금 보았던 삼국지는
참으로 재미있었고
삶의 다양한 양상과 경우가 들어가 있는
놀라운 오락소설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그러나 삼국지가 받아들여지고
유통되는 맥락은 정말이지
저에겐 끔찍했습니다.

동급생을 체벌하는 아이들의 우월감에 찬 독서와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변명을 축약시킨 말들의 출전.

한참이 지나서 대학 때였던가
그 친구를 잠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녀석은 고시책을 등에 가득 지고 있었습니다.
녀석의 등 위의 책들은 참으로 짐스러워 보였습니다.
지금 그 친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삼국지는 참으로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하지만 그것이 유통되는 맥락에 의해
또 다른 문제를 낳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현실을 이기는 지침서로
권력에 다가가는 모범답안이 나온 예제풀이로
삼국지가 받아들여지던 시대가 끝이 난 걸까요?
그러한 시대가 온 것일까요?
사회적으로 그릇되게 덧씌워지고
편향된 읽기에 의해
아이들이 편향된 이미지를
옳은 것이라 받아들이는
그러한 시대는 끝이 난 것일까요?
아마 이것은 영원에 이르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삼국지를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삼국지를 읽고 싶습니다.
순수하게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tom's diner / suzanne vega

2003/03/12 00:00 2003/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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