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감

from 나날 2016/07/17 23:17

몇 해 전, 도로의 중앙선 위를 걸어가며
얼굴이 마주치는 사람에게 끊임 없이 욕설을 퍼붓는
아주머니를 본 적이 있다.
얼마 전 교육부의 한 관리가
99퍼센트의 민중은 개,돼지라고 말했다가
공분을 사고 파면 당한 일이 있었다.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는
키워드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구성원들의 내면까지 설명해주는 단어는
바로 '모멸감'이 아닐까.

기본적인 인정 욕구를 배반하는 사회 속에서
모멸감을 받고 내상을 입는 사람들.
그리고 상처 입은 이가 오히려 누군가에게 모멸감을 주는 행위.
갑질에 당한 사람은 전화 상담원에게 욕을 해대고
자신이 소외 되었다고 느끼는 이들은 인터넷에 악플을 단다.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수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피해자로부터 무시 당하는 것 같아 기분 나빴다,는 것이다.
끔찍한 범죄의 원인을 심리적인 것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회의 심각한 모멸감의 구조는
역사적인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강제된 근대화와 전쟁으로 인해
폭력적인 외부의 힘에 주형된 사회의 틀은
이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에 끝없이 모멸감을 쌓아왔을 것이다.
식민지민을 다루던 일제의 강압적인 사회체제.
그리고 권력을 위해 힘으로 국민을 누르던 독재 체제.
그리고 뒤 이어 도달한 자본의 독재.
약삭빠른 이들은 모멸감을 주는 자리를 차지하고,
그 그릇됨에 반대하던 이들은 배제되어 가고
약한 이들은 모멸감 속에서 무고히 죽어가던 긴 시간.
그렇게 형성된 모멸감의 구조.

외적으로 드러난 폭력의 상처도 치유하기 힘든데
이처럼 속으로 스민 상처들은 치유하기도 힘들고
공적으로 드러내 공론화 하기도 힘들다.
법의 정의란 것이 제대로 지켜지지도 않는데
내면을 위한 정의란 도대체...

교사들도 가정방문을 잘 오지 않던
변두리 동네에 살던 어린 내가
학교와 사회에 의해 입었던 내상에 대해서,
또 권위적이거나 위선적인 것에 대해
예민하게 반발감을 느끼는 나의 성정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책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어릴 때 공감했던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 첫 머리를 옮겨본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 밖에,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그보다 먼저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살이란 모멸감을 입은 영혼의
자기 자신을 향한 폭력일 것이다.
많은 경우 모멸감을 입은 내면의 폭력은
외부를 향하겠지만.

아무튼, 이 사회와 현대사를 보는
관점 하나가 선명해진 것 같다.



*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고 나니
신약성경이 더 잘 읽힌다.
예수의 <산상수훈>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이것이야 말로 멸시 당하고 무시 당하던 이들을 향한
복음이 아니었던가?


















2016/07/17 23:17 2016/07/17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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