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이야기, 다섯

from 이야기 2016/10/04 14:00


중학교 때의 어느 날.
미술 선생님이 나를 불러 교사 회의실에 앉히고는
창밖의 나무를 그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수채로 나무를 그리는 기법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내가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수업과는 별도로 지도해주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후 시간부터는
선생님을 피해 도망다니기 시작했다.
미술대회에 나가라는 권유도 무시하고
어디론가 놀러가버렸다.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낙서를 많이 했고
또 미술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았지만
국민학교 5학년 때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결정했고 거기에 충실했다.

하지만 그후로도
아무 데나 그림을 그려대는
어릴 때부터의 습성은 남아
나는 여기저기 그림을 그려댔다.
노트는 필기가 아닌 낙서로 가득했고
책의 여백에도 선을 그어댔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광고회사에 다니면서
시안을 위한 카툰을 그리게 되었을 때,
내가 가장 몰입할 수 있는 일이
그림 그리기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선을 긋고 있는 시간 동안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림을 그린다는 의식도 없었고
그저 그림 그리는 나만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림 그리는 삶과는
너무나도 멀어져 있었다.


                                           바람 부는 거리- 수틴(Chaim Soutine), 1939

도시에서 자란 내게
나무란 배경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어릴적 나무를 그릴 때에도
유심히 바라보고 세심하게 그리는 법이 없었다.
쓱쓱싹싹 그려서 그럴듯하게 형태를 만들면 되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대상이었다.
그런데 회사를 그만두고
주변의 사람들과도 멀어지게 되면서
내 곁에는 발이 없는 나무만 남게 되었다.
품을 팔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는
말 없이 서서 반겨주는 나무들을
조금 더 자주,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사실 많은 것에서 멀어진 내게
길 가의 나무 이외에는
딱히 마주할 존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시간을 겪으면서
나무가, 그 한 없는 침묵이, 그 무력한 몸짓이
내 속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가만히 손짓하는 이파리들은
알 수 없는 수 만 마디의 말을 건네곤 했다.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내 속에 이런 질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무란 무엇이고,
나무란 누구인가?

많은 신화에 나무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모두 숲을 떠난 존재이고
숲을 향한 근원적인 동경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숲을 떠나 도시를 만들었지만
결코 나무와 이별할 수 없는 존재다.
내 곁에서 침묵하고 있는 거리의 나무를 보면
기억에 없는 고향의 손짓 같은 것이 느껴진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가을이 되면 잎을 떨어뜨리고
한 걸음도 스스로 옮길 수 없는 나무.
그 자리에서 흔들리며 긴 겨울을 버티는 나무.
그 침묵과 무력한 몸짓을 보며
나는 많은 위로를 받았다.
나의 말은 점점 사라지고
많은 생각도 버려졌다.


                                                                  회색나무 - 몬드리안(Piet Modrian), 1911

내 주변의 나무를 촬영하고 있다
나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원래 계획했던 작업이 불가능해져서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작업이다.
그런데 진행해나가면서
차라리 이 작업을 하게 된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중학 시절, 그 교사 회의실의
창 앞으로 돌아가 보자.
처음으로 나무을 유심히 보았던 그 시간으로.
물이 들기 시작한 이파리들이 조금씩 흔들린다.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면서
손짓을 하는 것도 같고
무언가 말을 걸고 있는 것도 같다.
그때 다 못 그린 그림을
나는 이제서야 마무리하려는 것일까?
그때 흔들리던 나뭇잎의 움직임은
지금 카메라 앞에 있는 흔들림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가
무엇이 될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깊은 곳으로부터 삐져나온
가느다란 한 줄기의 무엇을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



*

옛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나무 밑의 남자 - 2008























2016/10/04 14:00 2016/10/0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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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민예나아빠 2016/11/08 20:4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고독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나무 밑의 남자.

    • 마분지 2016/11/10 12:59  address  modify / delete

      나뭇잎이 다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생각에 골몰했던 어느 가을에 그린...
      그렇게 생각만 한 시간이
      너무 길지 않았나 싶네요.
      그런데, 올 가을은 잎이 물드는 게
      그닥 예쁘지 않네요.
      해 마다 잎이 물드는 게 조금 다른데
      올 해는 나무 따라 들죽날죽 제각각이어서
      한꺼번에 잎이 물드는 모습을
      보기 힘든 것 같아요.
      휴일에 해가 나는 날도
      별로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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