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시간

from 나날 2018/06/11 08:20

지난 4월,
고향에 가서 찍은 사진 둘을 합쳐놓은 것이다.

왼쪽의 벽은 그 옛날의 대한도기,
일제강점기에는 '조선경질도기주식회사'였던 곳의 벽이다.
몇 해 전까지는 긴 골목의 한 편을 이룰만큼
긴 벽이 남아있었는데
이제는 기껏해야 10미터 남짓 서있을 뿐이었다.
개항과 일제강점기 뿐 아니라
한국전쟁의 깊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또 나의 개인적인 기억도 담겨있는 곳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었다.
 
영도다리 부근을 둘러보았는데
너무도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키노시마 유곽의 흔적을 보여주는 낮은 집과
좁은 골목도 많이 사라졌고
일본에서 건너온 작은 지장보살도 없었다.
그리고 적산가옥들도 눈에 띄게 없어졌다.
그래도 옛 위안소였을 2층 건물은 남아있었는데
바로 옆에 호텔 신축 공사 때문에 기울고 있었다.
한국 근대사를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오른 쪽의 사진은
영도 하리(下里)의 바다와 하늘이다.
이곳도 예전 같지 않다.
어항은 매립되었고 마을 입구에 원룸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래도 하늘과 바다는 완전히 지울 수 없어서
어릴 때나 지금이나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바다의 소리를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다가가서 무언가를 물어도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던 바다,
그래서 결국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게 만들던 바다는  
여전히 똑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패총이 있던 곳에 살던 신석기인들이
고래를 잡기 위해 넘나들던 수평선도
방파제와 이런 저런 것들로 많이 가려지긴 했어도
여전히 수평선이었다.


*

내 고향 영도(影島)에 대한 영화 몇 편이
세상에 나와 있다.
재미있었고, 좋았고, 잘 보았다.
그러면서도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 보는 카메라를
만날 수 없어서 아쉬웠다.

영도라는 곳은
근대 이후 급격한 변화의 흔적이 많은 곳이기도 하지만
그 반대편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시간이 증발된 것 같은 영원의 이미지가
널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부산한 근대 이후의 시간과
초현실적이 공간이 함께 있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삶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수 있다.
어떤 특수한 공간이나 유별난 삶이 아닌
보편적인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근대의 난폭한 시간과 영원의 감각 사이에서
상처입고 고립되어 시들어가는 삶.
그것이야 말로 인간의 조건 아닌가?

다음 영화에서 그것을 담고 싶은데
과연 가능할지 자신이 없다.
이런 기획을 제대로 살려낼 수 있을까?
나의 현실적 여건으로 가능할까?
이미 영도와 관련된 영화가 제법 있는데
거기에 별 볼 일 없는
나의 한 편을 더하면 뭐 하나?

그러다가,
내게 단 한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다면
무엇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 고향 영도와
그 속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이다.
다음 일은 모르는 것이다.
다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사실 <나무가 나에게>도
애초의 계획을 실행할 수 없는 여건 때문에
세상에 선보일 기대도 없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만든 것 아닌가.


*

정말 힘든 한 달 여를 보냈다.
두 가지 중요한 일들을 힘겹게 매듭을 지어가고 있다.
그로 인한 피로와 후유증이 너무 크고
앞으로도 괴롭힐 일들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겠지만
일단 다음에 만들고 싶은, 어쩌면 만들 수 없을,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시도해야할
영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둔다.


*


아무튼, 걸어가자.

 



 






 








 
2018/06/11 08:20 2018/06/11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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