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 동기형

from 이야기 2003/04/27 00:00


*

오늘 동생의 결혼식에
동기형이 오질 않았습니다.
물어보기 힘든 사정이 있는 것일지도 몰라
형수께 묻지를 않았습니다.


*

우리 막내 고모네에 삼형제가 있었는데
그 유별남이 남달라 어린 시절부터
노래가 있었을 정도입니다.
남기 동생 동기, 동기 동생 창기...

상이 군인이셨던 고모부는
병이 심하셔서 요양소에서 돌아가셨고,
고모는 고모대로 삶이 어려워 여기저기 일 다니시는 바람에
어린 시절 세 형제가 모여 살았지요.
한 때, 저희 집에서도 한참을 올라가
소나숲이 시작되는 비탈 길의 집에 살았는데,
볕이 잘드는 작은 창이 하나 있어서
이상하게도 참으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방문에 창호지가 뜯어진 곳에
때 지난 달력 그림을 붙여두었는데,
그 그림이 모네의
<개 양귀비가 피어있는 길>이었습니다.
달력 밑에 그림의 제목이 씌어있었지요.
인상파 화가와 그림을 처음으로
유심히 들여다 보았던 것이
바로 그곳에서 였습니다.

하여간, 가끔 놀러가면
고등학생이었던 큰 형은
남은 신김치를 넣고 밀가루 봉지를 탁탁 털어서
김치전을 붙여주기도 했지요.
그 속에서 세 형제가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살았습니다.

*

앞 이야기가 너무 길었습니다.
오늘 제가 보고싶었던 형은
둘째였던 동기형이었습니다.
형은 어릴 때 늑막염을 앓았는데
치료를 제 때 못하여 3년을 못산다고
집안 어른 들이 쉬쉬하면서 말했지요.
하지만 아직도 형은
아직도 잘 살아있습니다.

*

초등학교 5학년때,
미술대회에서 입상을 한 적이 있는데
선생님의 실수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해
주최한 단체로 직접 상을 받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형이 어린 저와 동행을 했었지요.
내가 사무실에서 상을 받고 나오자
형은 마치 자기가 상을 받은 것처럼 기뻐했고
돌아오는 길에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버스 앞자리에 앉아 있던
기억이 납니다.

*

형과 함께한 기억이 여럿 있지만,
가장 깊이 남아있는 기억은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문상을 오신 모든 분들의 이야기가
저에겐 그리 편하지가 않았습니다.
중학교 3학년이던 저에게
너는 상고를 가서 빨리 졸업해
집안을 부양해야한다...
네가 장남이니 이제 가족은 네게 달렸다...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 너도...
...
어린 제 속의 어떤 부담들 때문에
그러한 말들이 불편하게 들렸겠지만,
그때의 저는 상주라기보다
그저 위로받고 싶은 어린 아이였을 것입니다.

그런 때 그 때,
동기형이 그 때 내게 해준 말을 떠올리면
아직도 코끝이 시려옵니다.
형은 주먹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고
모두가 떨던 학교 깡패들도
조직의 동생들에 불과했지요.

"누가 니 때리면 내한테 말만 해라...그러면..."
영화 "친구"에서도  나왔던 말이었습니다.
하여간 그 말에 나는
눈물을 흘릴 것 같았습니다.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도 못하였고
세련된 말도 쓰지 못했고
주먹이라곤 하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말도 못꺼내며 눈을 껌뻑이기만 하는
쑥스러워 하기만 하던 형.
저는 형의 그 말이
어떤 위로와 염려의 말보다
감사했습니다.

*

그후로 형은
그 쪽의 심부름들을 계속해왔던 것 같고
가끔은 원양어선을 타기도 했지요.
변두리의 그늘에서 별 볼일 없이
바스라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때 형의 말은 형이 내게 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말이었고,
어떠한 수사법으로도 도저히
감동시키지 못할 상태의 저를
감동케한 말이었습니다.
어떤 말도 그 누구도 위로하지 못한 어린 저를
안아주었던 말이었습니다.

*

형의 딸이 오늘 결혼식에 왔습니다.
어릴 때 동글동글 통통한 아이가
이쁜 삼촌왔다,면서 나를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여고생이 되어 쑥스러워 합니다.
여고의 핸드볼 선수가 되어 있습니다.

*

부산에 내려오면 늘 생각나지만,
이상하게 보아지지가 않는 동기형.
다음에 만나면 꼭 소주 한잔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태껏 형이 좋아하는 술 한 잔
같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

삼형제가 살던
그 어린 날의 자취방,
3년을 살지 못하리라는 이야기를
자신만 모르던 때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태어나 처음 치약이란 걸로 이빨을 닦으며
오래오래 입에 둔 거품이 꿀떡 넘어가자,
맛있네, 하면서 씩웃던
어린 형의 얼굴.





rocky raccoon / beatles
 

2003/04/27 00:00 2003/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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