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시나무

from 사진, 이미지 2021/08/04 12:00

길을 걷다 이런 나무를 만났다.

울타리는 세워야 겠고 나무는 자를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이 모양이 된 것 같다.
고개를 들어 가지와 잎을 봤더니
은사시나무인 것 같다.

대학 때 어떤 수업이 떠오른다.
시를 읽으면서 이런저런 감상을 나누는,
편한 수업이었다.
그 때 읽은 시 중에
<은사시나무>란 시가 있었다.
기말 고사를 치르러 강의실에 갔더니
조교가 시험지를 나눠주면서
집에 가져가서 작성한 다음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아주 편한 수업에 아주 편한 시험이었다.
그 문항 중 하나가 기억에 남아있다.
'은사시나무 이파리를 따서 요 옆에 붙이시오.'
식물 도감도 찾아보고 물어물어
은사시나무(라고 추정되는) 잎을
따서 붙인 다음 답안지를 제출했다.
시를 문자로 읽는데 머물지 말고
감각적 접촉을 경험해보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그때 읽었던 시들이 거의
기억나지는 않지만
박용래 시인의 시를 알게 되어
좋았던 기억이 있다.
다시 몇몇을 읽어보니
역시 좋다.

*

엔도 슈사쿠를 읽다가
기독교 작가들의 소설들을
조금 더 찾아 읽었다.
프랑수아 모리악, 그리고 조르주 베르나노스.
모리악, 좋았다.
베르나노스는 더 좋았다.
하지만 다른 번역으로 다시 읽고 싶었다.
몇 가지 메모를 옮겨 본다.

사랑할 줄 모르는 존재들에게
진정으로 심각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테레즈 데케루>

우리의 행동으로 형성된
두꺼운 층 아래에는
우리의 어린 영혼이 변하지 않은 채
자리 잡고 있다.
영혼은 시간의 흐름을 피해간다.
<밤의 종말>

나의 서투름은
어린 아이와 같은 서투름일까?
내가 자신을 때로 정녕 가혹하게
판단하기는 하지만
내가 가난의 정신을 가진 것을
의심한 적은 결코 없다.
어린이 정신은 가난의 정신과 닮았다.
그 둘은 분명 하나를 이룬다.

아무려면 어떤가? 모든 것이 은총이니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인간은 그들이 저지른
악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깊이 숨어 들어
자칫 찾아내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들의 어린 시절로부터 남아 간직된
손상되지 않은 몫, 수수한 몫을 헤아려서
이해되어야 할 것임을
나는 경험으로 이윽고 알게 되었다

성인과 영웅은 어린이 시절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
그러나 그들 삶이 커져 감에 따라
차츰 커 가는 어린 시절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베르나노스


*
 
코로나 백신 1차 접종을 받았다.

지금까지 2억 명 정도가 확진 되고
4백만이 넘게 사망했다고 한다.
특히나 저개발 국가의 경우가 더 심하다.
코로나 감염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과
관련이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많이 움직이고, 많이 쓰는 극단적 소비생활.
코로나의 창궐은 이런 문명에 대한
자연의 대응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런 소비생활을 지속하는 우리는
수많은 죽음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무수한 살인의 공범자가 아닌가?
당장 생활을 전적으로 바꿀 수는 없어도
변화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바이러스가 잠잠해진다면
우리가 이겨냈다고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인가?
불완전한 백신의 부작용으로 인한 죽음은
또 뭐란 말인가?

*

연일, 매미 소리가
맹렬하다.

































 
2021/08/04 12:00 2021/08/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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