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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공원
from
영도 影島
2021/10/16 00:00
오랜만에 찾은 동삼동 미니공원.
장승 옆에 작은 나무비가 서 있었다.
그 위에 검은 페인트로
원혼비(寃魂碑)라고 씌어있었다.
사실 이곳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어느날
재판도 없이 처형된 이들의 시신이
수십구 이상 버려진 곳이다.
전쟁통에 일어났던
보도연맹관련자를 포함한
수십 만의 학살의 한 부분.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어느 절의 스님이 천도재를 올리고
종교인들이 모여 합동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작은 비석 하나 세우지 못했다.
그런데 누군가 이렇게
나무 비를 세우고 간 것이었다.
검색을 해보니2018년,
한국전쟁 피학살 유족들이
과거사법의 개정을 촉구하며
위령순례를 하면서 세운 것이다.
함안, 통영, 산청과 부산 등의 학살지를 방문하여
백비(白碑)를 세웠다는
기사
를
확인할 수 있었다.
*
공원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걸으면
그냥 지나치고 말 것이다.
동삼 삼거리에서 아랫길로 들어가서
도로의 왼편 자투리 땅에 있는
이름처럼 작은 휴게 공간.
여기에 있는 것은 벤치가 하나, 망가진 평상이 하나,
그리고 몇몇 운동기구와 비석들이 전부다.
옛날에는 언덕 바로 아래가
모래가 깔린 해변이어서 정취가 있었지만
지금은 매립이 되어
공장과 이런저런 시설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이 좁고 보잘것없는 곳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곳에 비석들이 여럿 서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실향민 시인
한찬식
의 시비(詩碑)다.
함경도의 지주 집안의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을 다녀왔던 그는
해방 후 숙청이 시작되자 월남 했고
지금은 폐교된 대양 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를 하며 시를 썼다고 한다.
잘 꾸며진 비석에는 그의 시<늪>이
새겨져 있다.
더 아래쪽에 있는 작은 비.
영도에서 태어난 수필가이자 시인인
김소운
(金素雲)의 문학비다.
그의 문학적인 자취를 떠올리면
참으로 소박한 비석이다.
그의 할아버지 김치몽은 구한말의 관료로
기독교를 받아들여 개화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문중에서 배척을 받으면서
영도에 들어와 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가 제1영도교회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아버지 김옥현 역시
탁지부의 관료였는데 암살을 당했다.
그 때문에 집안은 어려워졌고
어머니는 러시아로 떠나버려서
김소운은 고아처럼 자라야 했다.
어린 나이에 밀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을 하며 문학활동을 했다.
몇 편의 글 때문에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짧은 몇 편을 들어 그의 문학 활동 전체를
폄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생뚱맞게 느껴지는 장승과 솟대.
영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나름대로 사연이 있기는 하다.
여기에 버려쳤던 피학살자들을 위한
위령비의 건립이 좌절되고 나서
그대신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왜 이곳에 작은 위령비 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지자체의 문제일까,
의회의 문제일까?
좌익으로 몰려 재판도 없이
죽은 이들이 버려진 곳,
반동으로 몰려 고향을 잃고 떠나온
시인의 아픈 마음이 깃든 곳.
비록 좁은 곳이지만
좌우를 넘어 고난의 역사 속에서
고통을 겪은 마음들이
함께 머무는 곳이 되면 좋겠다.
아직 그것이 불가능한가?
*
사실 2016년 즈음,
이 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다.
<아랫길>이라고 제목도 붙여두었다.
이 곳의 4계절을 담으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
여기 버려졌던 이들의 삶을 더듬는 영화.
하지만 당시에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작업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내 사정이 많이 팍팍했다.
그래서 내가 사는 서울의 나무들을 담아
<나무가 나에게>를 만들었다.
영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곳에 관한 글도 쓰고 있다.
하지만 아쉽다.
억울하게 삶을 마감한 이들의 삶을 더듬는,
내 마음 속에 오래, 깊이 있던 이야기를
짧은 글과 몇 장의 사진으로
제대로 풀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정도에서 멈춰야 하는 걸까?
어쨌거나,
지금의 것을 마무리 하도록 하자.
영도에 대한 스물 세 개의 짧은 이야기 중
스물 두 개를 정리했다.
추워지기 전에 영도 사진을
많이 찍어두고 싶지만
가능할지...
여튼, 걸어가자.
마분지
2021/10/16 00:00
2021/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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