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막장

from 이야기 2003/05/12 00:00


*

5월 이어서 그럴까요?
가족들, 어릴 때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네요.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나라의 섬유 산업이 다 망가지던 무렵,
결국은 고모가 하시던 옷 공장도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거기서 오래 일을 하셨지요.
옷을 만든다고 하지만
무거운 기계를 몸으로 움직여야 하는 육체 노동이었지요.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선 채로
쇠붙이 기계를 움직이셨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그런 노동에
적합한 분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할아버지의 집은 평안북도에서
알려진 잘 사는 집이었고,
아버지는 육남매 중 막내였습니다.
그러니 어릴 때에는 아무리 일제시대라고는 하나
고생을 모르고 사셨겠지요.
그러다 남북의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열 두세살의 나이로
누나,형들과 함께, 혹은 흩어져서
부산까지 내려오신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땅에 있는 과수원에서
일단 씹어보고 단  과일만 골라 먹던 막내 아들.
고향을 떠나 이천리를 내려오는 길은
상상을 하지 않아도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해주에서 잡히고
서울와서 경찰에게 몽땅 털리고...

*

그러나 그러한 고생과는 달리
아버지의 막내 아들같은 기질과
어릴때의 부족함 없는 생활은
아버지의 정서의 바탕에
많은 좋은 것들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영도, 부산에서도 물을 건너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몰려 살았던 곳에서 사셨지만,
아버지는 배운 바 없어도 그림도 잘 그리셨고
또 노래도 하셨고
가끔은 교회에서 혼자 배운 피아노를
둥둥당당 치시기도 하셨지요.
그런 아버지께 저와 동생들은
많은 것을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물론 조금 성마르고 까탈스러운
기질도 물려받았겠지요.

어린 날 어머니가 아프시면
아버지는 아이들 다섯을 일일이 씻기시고
옷을 갈아입히시고
불을 때어 맛있는 밥을 지어주셨지요.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
어쩌면 저희 형제들이 살아가는 힘은
그 아버지의 손길과 따뜻함이
마음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러나,
그런 모습을 제하고 볼 때
아버지는 고향에서 이천리나 떨어진
바다의 끝에 와서
아이처럼 끝없이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직접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없지만,
고속버스 터미널 앞을 지날 때,
저 버스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천리를 간다,라고
하셨을 때의 그 말이
지금까지 제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말하지 않고 그렇게 툭 비어져 나온 그리움을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어릴 때의 생활과도 동떨어지고
청년 때의 꿈도 다 접은채, 
쇠붙이 기계를 움직여 옷을 만들면서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요.
그것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손을 공장의 벽에 썼던
글 하나가 기억이 납니다.

고모네 공장이 문을 닫고,
기계들이 뜯기워 나가자
창문도 없는 맨 구석 자리의 벽면에
크레용으로 적힌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어린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징용을 당해 남양군도의 막장에서
죽어가던 어린 조선인 노동자들이 쓴
낙서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엄마 배고파...라던가
나는 누구누구 어디 출신...이라는
낙서 말이지요.

아직도 그 글씨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지지만
아버지가 쓰셨던 구절은 성경의 글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몇 군데 반복해서 나오는 것인데
"그 영광을 열방(列邦)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라는
구절이었습니다. 

기계가 뜯기워 나가고
굴러다니는 실타래와 먼지들과
옷을 짜는 바늘들이 발을 찌르던 망한 공장의 가장 후미진 곳,
이제는 자리의 주인도 없는 벽면에
혼자 남아있던 벽의 글씨.

그 글의 의미는 대충 풀어쓰자면.
"신의 바른 정의가 온 세상에 전해지고,
그 바름이 온 세상 사람들 속에 펼쳐진다"라는
예언이며 희망의 말씀입니다.


어린 날 고향을 떠나
어쩌면 살아서 돌아갈 수 없을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이제는 가장이 되어
하루 열 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리던 아버지의 막장에
씌었던 그 희망의 말씀.

그러나 그것은
이땅에서의 고향이 회복된다던가
또 다른 보상이 네게 주어진다라던가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궁극의 희망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그 궁극의 희망의 글을 대면하면서
아버지는 하루 종일 힘들게 옷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
당신의 그리운 어머니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절망감을 그렇게 넘어서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

아버지가 만든 동요의 멜로디가
가끔은 기억이 납니다.
무조(無調)에 가까운 아름다운 노래였는데,
지금 그 악보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다만 몇 소절만 저의 머릿 속에 있습니다.
거의 변화가 없는 멜로디,
변하는지 마는지 진행되는 선율과
아이스러운 가사.

그런 속을 지녔으면서도
전혀 낯선 남쪽 사람들과 어울려서
험한 시절을 살아가셨던
여린 속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

노예로 잡혀온 아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야기들이 제법 있습니다.
우선 기억나는 사람은
아일랜드를 변화시켰던 성패트릭입니다.
조금은 비약일지 모르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런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어쩔 수 없는 힘에 끌리어
멀고먼 땅으로 왔지만
오히려 주변의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다독였던 사람.

고집만 세었던 어린 장남을 제외하고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좋은 분으로
삶의 중요한 분기점에 의미있는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제대로 보게 됩니다.

전쟁 후 가난하고 갈 곳 없고
어리고 버려진 사람 속에 들어간
어리고 버려졌던 아버지.

여섯 식구를 부양하느라
하루에 열시간이 넘는 노동을 하시고
또 만나는 사람 마다의 이야기에
귀 기울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작은 자신이 받을 위로는
제대로 받지 못했던 아버지.
그래서 기도밖에 길이 없었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이 못난 아들은 이십년이 걸린 셈입니다.

*

79년의 일일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엘 갔고
라디오에선 흘러간 댄스 밴드인 보니엠의 노래가
나오고있었습니다.
"River of Babylon"이란 노래였습니다.
그때  한창 유행하던 노래였는데
아버지는 그 노래 가사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시편 137편의 내용 그대로이다,라고...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 중에 악사들이 있었겠지요.
그들을 향해 바벨론의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을 찬양하던 입과 악기로 
어찌 저 잔인한 정복자이며 악의 세력을 위해
노래를 하겠냐며
나무에 악기를 걸어 놓고
운다는 내용입니다.

끌려온 낯설고 험한 이국에서
바르지 않은 노래를 강요받는 삶.
비록 노래에 빗대긴 했지만
어쩌면 그것이 아버지의
가장 솔직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

마흔이 다되어서야
고집센 장남은 아버지를 살갑고
보고싶고 그리운 존재로,
그리게 됩니다.




rivers of babylon / melodians


그 공장 벽의 글씨를 옮길 수 없으므로
아버지 성경책 뒷면에 남은
같은 성경 구절의 사진을 올린다.
그리고 노래도 'boney m"의 것이 아니라
오리지널로 바꾸었다.

2003/05/12 00:00 2003/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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