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비

from 이야기 2003/07/29 00:00


1996년 7월, 홍콩의 타이쿠싱(太古城)

급한 일 때문에 느닺 없이
홍콩의 어떤 광고대행사에 끌려간 나는
밤을 새며 수십개의 광고시안을 만들던 사이사이
캐다나인 알토(Arto Hampartsoumian)라는 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아르메니아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왔으며,
자신도 아르메니아를
고향으로 여긴다고 했다.

터키 옆,
온통 회교국에 둘러싸인
기독교국 출신 답게 그는 장로교 신자였고
어린 시절엔 주말마다
아르메이안 스쿨로 가서
아르메니아의 글과 역사를 배웠다고 했다.

아르메니아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를 들었는데,
서양사에서 처음으로 철기를 사용했던
힛타이트족이 그들의 조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강력한 철기를 바탕으로
역사를 빛냈던 것은 까마득한 옛날의 일.
근세 이후로 아르메니아는
주변의 회교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쉽지않은 역사를 살아왔다.
항존하는 위협에 둘러 싸인 나라의
후예들이 그러하듯,
그 친구는 자기네 역사에 대한 애정이 두터웠고,
제국주의적 강대국의 길을 걸었던 나라,
특히 일본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친구와 이야기를 중에
아라랏 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노아의 방주가 있다는 그 아라랏산.
그 산이 아르메니아에 있다는 것이었다.
성경상의 명칭 그대로.


1999년 여름, 서울

40일이 넘도록 비가 내렸다.
그 여름 내내 나는
"나는 방주를 타지 못한거야"라고
중얼거리고 다녔다.

아이 엠 에프였고,
원하지 않던 직업은 9년째로 접어들어
돌이킬 힘도 멈출 엄두도 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이정표들은 폭우에 꺾어지거나,
쏟아붓는 빗줄기 속에서 흐려져
보이지도 않는 것 같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 같은 장마.

늘 자정무렵에야 퇴근을 하고
그때까지 잠들지 않던 갓난 아이 치영이와 놀고나서,
치영이도 잠들고 혼자 깨어 있으면
어김 없이 혼자 있는 빗속이었다.

세상 천지에 물이 가득했지만
목이 말랐던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마셔도
해갈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2002년 10월, 서울

놀이터에서 놀던 치영이가
하늘을 가리켰다.

놀이터의 꼬마들은 놀이에 여념 없었고,
조금 큰 아이들은 축구공을 쫓거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쳤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어른들은
하품을 하거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하늘 좀 봐요"
치영이가 가리킨 하늘엔 무지개가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하늘에
무지개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빨주노초파남보의 순서가 아니라
보남파초노주빨의 순서였다.

중학교 때, 영도의 산허리로 떨어졌던
쌍무지개를 본 이후로
처음보는 무지개였다.
나는 카메라로 거꾸로선
무지개를 찍었다.



2003년 7월, 서울

아이에게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었던
미치광이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는 웃기는 할아버지 이야기라며
너무 좋아했다.
자고 일어나 엄마에게
일러주기까지 한다.


2003년, 끝나지 않는 빗속

지금 드는 생각은
방주에 타지 못했노라고 중얼거리던
그 암담한 시간 조차도
나는 방주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 속의 동물들이
얼마나 고독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신의 약속, 구원받은 존재로서의 승선.

그러나 사방은 온통 빗줄기와 천둥일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겨우 떠다니는 배 한척.
그 배를 타고 있던 노아와 그 자식들도
고독하고 고독했으리라.
짐승들은 아마도 겨울잠 같은 상태에서
최소한의 생기로 가까스로 대사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완전한 침묵과 숨붙어 있음의 경계에서
아슬하슬하게.
그들은 빽빽이 붙어 있으면서도
낱낱이 혼자였으리라.


그 적막하고 고요한,
약속에 이르는 길.


약속을 믿는 다는 것은
계약서 따위를 믿는 다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존재의 극한까지 스스로를 옮겨가며
살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루어지는 약속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버려지고 저주받은 존재가 아닐까,하는
근저의 두려움을 지니고 살지만
우리는 비그친 아라랏산의 방주에서
걸어내려온 약속의 사람들이다.

지금 이 비가 언제 그칠지 모르지만.



ps:그날, 아이와 보았던 무지개 보고 싶으시다면 클릭!!

아이가 발견한 무지개




 

noah's dove / 10000 maniacs

2003/07/29 00:00 2003/07/29 00:00
Tag // , , ,

Trackback Address >> http://lowangle.net/blog/trackback/92

댓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