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from 나날 2024/01/16 17:36


봄, 여름 가을의 나무는
자신의 표정을 보이지만
겨울 나무는 그 자세를 보인다.
잎이 모두 떨어지고 나서
태양을 향했던 가지와 줄기가
드러나는 것이다.
마른 가지에서 잎이 돋는
새 봄의 기적은
어쩌면 저 자세 때문인지도
모른다.


*

이십 년 가까이
카메라를 들고 살았다.
짧은 영상들을 많이 만들어서
홈페이지에 올렸고,
장편 다큐를 두 편 만들었다.
다큐들은 모두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지만
관객은 다 합쳐서
이백 명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내 정체성에 닿아있는 것은
'영화'였다.
그럴 듯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했고
그런 것들을 만들며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쩌면
조금은 더 깊은 영화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한 해,
그 나름의 영화마저
만들기 어려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마냥 앉아있지는 않았다.
몇 해 전부터 쓰기 시작한
길고 긴 글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새로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난 해의 하반기를 보냈다.
그러면서 조금 씁쓸해졌다.
오랫동안 마음의 중심에 있던 영화를
떠나는 건가 싶어서
감상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내 깊은 곳으로 내려가서
무언가를 써온 시간이
나를 어딘지 조금 다른 곳에
이르게 할 것 같다.
이런 우회로를 거쳐
영화를 다시 만들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날은 알 수 없다.
지금은 내게 주어진 것에
마음을 두는 게 맞다.

지금은 쓰는 모드.
그런데 카메라를 들건, 연필을 쥐건
나는 결국 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새롭게 시작한 긴 글은
다큐로 담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이렇게 글을 통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영화건 글이건
그 무언가를 향한 한결 같은 자세에서
이 겨울을 지나갈 힘이 나올까?
부디, 그러하길 바란다.


*

겨울이 깊다.


















2024/01/16 17:36 2024/01/1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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