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이라도

from 나날 2023/01/19 14:00

지난해 말 물리학 책을 읽었다.
아주 재미있었다.
그 책에 의하면 '시간'이라는 것은
우주의 한정적인 곳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요인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우주는
시간과 관계 없는 상태로
존재한다고 한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면
두려움, 회한, 불안과 공포,
그리고 감상같은 마음의 일들도
없지 않을까?

인간이라는 종은
시간이란 것이 힘을 발휘하는
이 세계에 적응하면서 살아왔다.
미래의 불확실에 맞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며
진화를 거듭했을 것이다.
그래서 두뇌가 발달했을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은
머리를 쓰는 길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데 안전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 중심인 사안이다.
우선 내가  살지 않으면
우주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자신, 그러니까 '나' 또는 '우리' 외의 존재들은
어째도 좋은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쁜 일들이 만연하게 된다.
인류 역사의 나쁘고 심각한 일들은
인간이라는 종이
시간에 대응하기 위해서 행한 일들로
생긴 것이 아니었을까?
죽음과 전쟁으로 점철된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

시간이 관여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맹렬하게
몰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희망은 없을까?
남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피엔스의 반사적 사고를
조금이라도 내려놓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서로의 얼굴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가능하다면
서로의 손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든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 지구의 시간이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이 우주의 물리적 조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열리는
어떤 경지가 있지 않을까?

사실, 너무도 많은 선지자들이
이 같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2천년 전의 어떤 사내는
당시의 세상을 보며
이렇게 한탄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지금도 다를 바 없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관심이 없다.
희망은 더 흐려지고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작은 여유마저
빼앗기고 있다.
물질적인 능력을 가진 이들은
더욱 극심하게 시간의 노예가 되어
옆을 볼 줄 모른다.
자기 곁에 누가 울고 있는지
보는 눈도 없고
누가 노래하고 있는지
들을 귀도 없다.

그러나 길은
이것 밖에 없을 것이다.
내 곁의 사람을 보는 것
그 마음을 아는 것
그래서 함께 울고 웃는 것.


*

새해에는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면 좋겠다.
내가 쓰고 만드는 것이
사람들 마음에 조금이라도
닿게되면 좋겠다.

걸어가자.













2023/01/19 14:00 2023/01/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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